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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1만 7,240km 떨어진 지구 반대편 남극 킹조지섬에 약 20명의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있다. 올해로 벌써 38년째에 접어드는 바로 남극세종과학기지다. 세상과의 고립을 자처한 이곳에선 연구원과 기술자, 의사, 요리사 등 분야별로 선발된 월동대원들이 갖은 우여곡절 속에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길고도 짧지 않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대기과학연구원'의 일상을 이어갈 아빠의 삶을 가감없이 그려낸다. <편집자주>
세종기지에 먼저 도착 후 다른 동료가 오길 기다리던 중이었다.
갑자기 조용하던 기지가 시끄러워졌다.
우리 대원들의 가방이 일부 바닷물에 젖었다는 얘기는 이미 들었지만,
'높은 파도 때문에 캐리어에 조금 물이 묻은 거겠지…'하고 별걱정 하지 않던 나를 비웃듯 무전 소리가 시끄럽게 이어졌다.
그제야 나는 조용히 무전기에 귀를 기울였다.
전임인 37차 대원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걸 보니 무언가 심각한 일이 터진 걸 느낄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후 37차 총무님을 통해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됐다.
"죄송합니다. 지금 38차 대원들의 가방이 바다에 빠져 모두 젖었고, 일부는 유실되어 지금 다시 찾으러 가야 합니다. 먼저 오신 대원분들은 숙소에서 대기해 주세요."
우리는 모두 한동안 얼어붙어 있었다.
저마다 가방 안에는 앞으로 1년 동안 기지에서 고립된 채로 생활할 때 꼭 필요한 노트북, 속옷, 취미용품, 안경, 동료들의 생일선물 등 필수품들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가방이 바닷물에 젖었고, 또 일부는 잃어버렸다는 얘기를 듣고는 모두 말문이 막혀버렸다.
왜냐하면, 이곳은 한국처럼 아무 때나 인터넷 쇼핑을 통해 다시 물건을 사고 배송받을 수 있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무전기 소리에 집중했다.
우리 대원들과 짐을 기지로 이송하기 위해 이미 고무보트 2대가 바다로 나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곧 다른 고무보트가 추가로 투입됐고, 러시아 기지에서 대기 중인 우리 38차 대원들도 유실된 가방을 찾는 작전에 투입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먼저 도착해 기지에 남은 우리는 부두 뒤로 일렁이는 높은 파도를 보며 숨죽인 채 기다렸다.
그리고 몇 시간 뒤 바닷물에 빠진 가방을 실은 고무보트가 기지로 오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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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로 유실된 가방을 제외한 나머지 가방을 실은 고무보트가 부두에 도착했고, 가방이 올라올 때마다 하나둘씩 우선 자기 짐을 확인한 대원들의 호명이 들렸다.
"고용수(지구물리), 방성규(의료), 오영식(대기과학)…."
개인 가방을 찾은 대원은 총 18명 중 12명이었다.
하나둘 호명이 이어졌지만 결국 6명의 대원들은 가방을 받지 못하게 됐고,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한동안 부둣가에 서서 괜히 물에 젖은 자기 가방만 내려다보았다.
우선 가방을 찾은 대원은 물에 젖어 무거워진 가방을 들고 생활관으로 이동해 전자제품부터 하나씩 꺼내 물로 씻고 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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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전자제품이 망가져 못 쓰게 된 것도 참담했지만, 아직 가방을 찾지 못한 대원도 있었기에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짐을 정리했다.
아직도 8개(개인 가방 6개, 공동물품이 든 가방 2개)의 가방이 차디찬 맥스웰만(Maxwell Bay) 어딘가에서 떠다니는 상태였지만 높은 파도는 움츠러들 생각이 없어 보였다.
또다시 몇 시간이 흐르고 '이런 파도에 이렇게 넓은 바다에서 나머지 가방을 찾는 건 불가능하겠다!'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휘감을 때 정적을 깬 대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잘 들으세요. 가방이 젖어 손해가 발생해 속상하겠지만, 남극은 그만큼 위험하고 접근하기 힘든 곳입니다. 날씨가 안 좋아 이런 일이 발생한 건 참 안타깝지만, 지금, 이 순간도 37차대와 아직 복귀하지 않은 우리 38차 동료들이 최선을 다해서 유실된 캐리어를 수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긍정적인 생각으로 기다려 봅시다."
정작 대장님 가방은 아직 찾지 못해 바다를 떠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대원들을 다독이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찡해지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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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위기와 좌절의 순간에도 차분히 대원들을 챙기는 대장님이라니 지금, 이 순간은 힘들지만, 앞으로 1년 생활하는 게 힘들진 않겠구나!'
불과 몇 시간 만에 혼자서 좌절과 감동의 감정을 번갈아 느끼고 있을 때였다.
'치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무전기를 통해 흥분된 목소리가 들렸다.
"통신실! 통신실! 세종 15호!"
우리 가방을 수색하러 나간 고무보트에서 기지로 보낸 무전이었다.
"세종 15호! 세종 15호! 세종기지 통신실!"
우리는 휴게실에 앉아 너나 할 것 없이 기지 통신실과 고무보트의 무전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유실된 가방 총 8개 중 7개를 찾았음. 지금 기지로 복귀 중. 현재 기지 도착 5분 전!"
"네, 도착 5분 전, 확인! 기지 내 전 월동대원에게 알립니다. 현재 세종 15호 기지 도착 5분 전입니다."
불행 중 다행일까?
바다에서 떠돌던 8개의 가방 중 1개를 제외한 모든 가방을 찾았다는 무전을 듣고 우리는 땅바닥에 고꾸라질 듯 부둣가로 달려나갔다.
높은 파도 저 너머로 태극기를 단 고무보트가 보였고, 정말 보트 안에는 가방이 여러 개 실려 있었다.
기지에 도착한 고무보트에서 물에 젖은 가방이 부두 위로 옮겨졌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찾지 못한 1개의 가방이 제발 동료 대원의 개인 가방이 아닌 우리 38차대 공동물품이 든 가방이길 바라며 하나둘 확인했다.
"이건 대장님, 이건 우리 막내 안승민(고층대기) 대원…. 이건 총무님(황의현) 가방."
"와~ 진짜 다행이다. 하나 못 찾은 게 우리 공동물품이 든 가방이야!"
뒤늦게 가방을 건네받은 대원들은 자기 가방이 바닷물에 젖었는데도 하나같이 로또에라도 당첨된 양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렇게 우리 38차 월동대원의 가방은 남극에 도착 후 높은 파도로 모두 바닷물에 흠뻑 젖긴 했지만, 다행히 공동물품이 든 가방 1개를 제외한 개인 가방은 모두 찾을 수 있었다.
(일주일 뒤 마지막 남은 1개의 가방도 러시아 기지 앞 해변에 떠밀려와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앞으로 1년간 기지에서 고립된 채 생활해야 할 동료의 귀중한 살림이 든 가방을 찾기 위해 높은 파도를 무릅쓰고 함께 고군분투한 대원들의 노고를 생각하니, 나는 남극월동대의 희생정신과 동료애가 느껴져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대장 김원준)의 남극 생활은 이렇게 어느 차대보다 뜨겁게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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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글쓴이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 오영식 작가의 여행 내용은 블로그와(blog.naver.com/james8250) 유튜브(오씨튜브OCtube https://www.youtube.com/@octube2022)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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