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_아빠의 남극일기(3)]맨땅 드러낸 세종기지와 빨라지는 펭귄의 부화시기

작성 : 2025-03-08 09:00:01
세종기지, 서부영화처럼 걸을 때마다 흙먼지 피해야
펭귄 길, 메마른 흙에 날카로운 돌덩이 드러나
펭귄 부화시기도 빨라져..'연쇄변화' 우려
우리나라와 1만 7,240km 떨어진 지구 반대편 남극 킹조지섬에 약 20명의 한국인들이 모여 살고있다. 올해로 벌써 38년째에 접어드는 바로 남극세종과학기지다. 세상과의 고립을 자처한 이곳에선 연구원과 기술자, 의사, 요리사 등 분야별로 선발된 월동대원들이 갖은 우여곡절 속에 하루하루를 이어가고 있다. 길고도 짧지 않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곳에서 '대기과학연구원'의 일상을 이어갈 아빠의 삶을 가감없이 그려낸다. <편집자주>

▲(2014년 12월) 세종기지는 여름에도 관측동이 눈에 뒤덮여 있었다

내가 남극 땅을 처음 밟은 건 10년 전인 2014년 12월 7일이었다.

남극세종과학기지가 있는 킹조지섬의 유일한 공항인 칠레 공군기지(프레이) 활주로에 다른 항공기의 바퀴가 빠지는 사고가 있었다.

이로 인해 항공 운항이 몇 주 동안 중단됐고 당시 내가 소속된 28차 월동연구대는 칠레 푼타아레나스(Punta Arenas)에서 당초 계획보다 5일을 더 쉬고 8일 만에 킹조지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생애 처음으로 남극에 도착한 나는 여름인데도 주변이 온통 눈으로 덮인 광경에 사로잡혔고, 무거운 여행 가방을 손으로 든 채 러시아 기지 앞 해변까지 걸어갔다.

▲(2014년 12월) 하역을 위해 일부러 제설작업을 해놓은 세종대로

러시아 기지 앞 해변에는 크게 '남극세종과학기지'란 글씨가 새겨진 고무보트를 타고 27차 월동대가 마중 나와 있었다.

우리는 짧은 인사 후 바로 구명복을 갈아입고 빙하가 떠다니는 맥스웰만(Maxwell bay)을 40여 분간 가로질러 세종기지에 도착했다.

세종기지의 본관 건물엔 세찬 바람에 금방이라도 찢겨나갈 듯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많진 않았지만, 주변엔 눈이 쌓여있어 조심조심 건물로 들어갔었다.

그게 10년 전 남극에 대한 나의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10년 만에 보게 된 세종기지의 모습은 예전과는 아주 많이 변해있었다.

▲(좌) 2014년 12월, (우) 2024년 12월, 세종기지와 주변 지형에 눈이 쌓인 면적이 크게 차이가 난다

우선 1988년에 처음 지어진 후 계속 사용해 아주 낡았던 연구동 건물 자리엔 '내가 지금 남극에 있는 게 맞나?' 하고 의심할 만큼 웅장한 최신식 건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당시 하계연구대 숙소로 사용하던 건물은 박물관으로 개조해 운영 중이었다.

여기저기 걸으며 기지 시설을 둘러보다가 나는 점점 이곳이 '남극이야? 사막이야?'하며 헷갈리기 시작했다.

걷는 곳마다 눈은커녕 바닥에선 흙먼지가 풀풀 날렸기 때문이다.

물론 남극은 지리학적으로 사막으로 분류된다.

연평균 강수량이 아주 적고(연 200mm 이하) 건조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10년 전에 내가 겪은 남극과 세종기지는 어딜 가든 눈이나 눈이 녹아 흐르는 물 때문에 눈과 진흙이 많은 곳이었다.

그런데 지금 세종기지는 걸을 때마다 과거 미국 서부영화의 한 장면처럼 흙먼지를 피해야 할 만큼 땅이 메말라 있었다.

물론 나는 대기과학을 전공했기에 '12월은 남극의 한여름'이란 사실과 아무리 기후변화가 진행되고 있어도 '아직 겨울철 남극은 온 세상이 눈으로 뒤덮인다'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과거의 세종기지는 겨울 뿐만 아니라 여름에도 어딜 가나 눈이 많은 곳이었다.

나는 시설을 둘러보다 나의 주 업무 공간인 대기관측실로 향했다.

세종기지의 대기 대원은 아주 많은 대기 관측 장비를 운용한다.

이곳은 기상청에서 근무했던 나도 보지 못한 아주 다양한 관측 장비가 설치되어 있다.

▲대기관측실, 온실기체와 에어로졸 등 다양한 대기 관측장비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세종기지에서 운영하는 대기 관측 장비는 설치 환경이 열악하고 장애가 났을 때 바로 적절한 대처를 하기 어려운 특성으로 인해 대부분 낡고 여기저기 문제를 안고 있었다.

10년 전 어느 날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관측하는 장비의 모니터를 보니 수치가 400ppm을 넘어갔고,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었다.

대기를 정식으로 관측한 역사에서만 본다면 아직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400ppm을 넘긴 사례는 없었다.

아주 역사적인 순간이었지만, 당시 나는 이렇게 생각했다.

'아~ 장비도 오래되고 보정이 제대로 안 돼서 그렇겠지!'

단순히 그렇게만 생각하고 다음 차대인 29차 대기 대원에게 업무를 인계하고 기지와 작별했었다.

그런데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농도를 정밀하게 측정하는 그 장비는 그 후로도 계속 운영됐고, 10년 만에 세종기지로 와서 나는 제일 먼저 바로 그 이산화탄소 관측 장비를 찾아가 보았다.

그리고 그 관측 장비의 모니터엔 현재 420ppm이란 숫자가 표시되고 있었다.
(*ppm : 1백만분의 1을 의미하며, 이산화탄소 420ppm은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가 0.042%만큼 있다는 뜻이다)

▲대기중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2025년 현재 420ppm을 넘었다

이산화탄소는 대표적인 온실기체로 대기 중에 이산화탄소의 양이 증가하면 온도가 상승하는 결과를 일으킨다.

즉, 현재 지구 대기의 성분 중 이산화탄소량은 과거 어느 때 보다 높은 상태이며 그 비율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다.

나는 하계연구원 중 펭귄을 연구하는 생물연구원을 따라 '펭귄마을'이라고 불리는 171번째 남극특별보호구역(ASPA No.171)으로 갔다.

펭귄마을에는 젠투펭귄과 턱끈펭귄이 5천 쌍 이상 집단 서식하고 있으며, 주변엔 남극도둑갈매기와 남방큰풀마갈매기 등 다양한 조류가 서식하고 있다.

▲ (좌) 턱끈펭귄, 성격이 사납다 (우) 젠투펭귄, 성격이 온순하고 겁이 많은 편이다

기지에서 30분 정도 걷자 펭귄마을 입구 표지판이 나왔고, 남극에도 조류인플루엔자가 퍼지고 있었기에 우리는 최대한 접촉하지 않으려 보호복으로 갈아입고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과거에는 펭귄마을에 가려면 무릎까지 쌓인 눈길을 걷느라 장화를 신고 가야 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장화는커녕 평범한 운동화를 신고 걸으며 오히려 눈이 쌓인 곳이 어딘지 찾아봐야만 했다.

펭귄은 여름인 12월에서 이듬해 2월에 돌로 만든 둥지에 보통 2개의 알을 낳고 암수가 교대로 알을 품는다.

교대한 펭귄은 펭귄마을 아래 바닷가로 걸어가 바닷속에서 크릴을 배불리 먹고 돌아와 교대한다.

그래서 펭귄마을 입구 언덕은 펭귄들이 줄지어 다니는 길이 형성되어 있고, 연구원들은 이 길을 멀찍이 피해서 다녀야 한다.

눈이 쌓인 언덕을 짧은 다리로 뒤뚱뒤뚱 걷는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워 한참을 바라보곤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많이 쌓인 눈으로 미끄럽던 그 언덕이 이젠 메마른 흙과 날카로운 돌이 드러나 있어 펭귄들이 다치진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펭귄마을 언덕길, 눈이 많이 녹아 바닥의 돌이 드러나 있었다

매년 펭귄을 연구하러 오는 연구원의 말을 들으니 눈이 쌓인 면적이 줄고 따뜻해져서인지 매년 펭귄의 부화시기가 앞당겨지고 있다고 했다.

언뜻 생각하면 따뜻해지고 부화시기가 앞당겨지면 '오히려 잘된 일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이 많을지 모르나, 생태계에서 번식 시기가 앞당겨지는 건 단순한 일이 아니다.

한 종의 아주 작은 변화일지라도 다른 종에게까지 연쇄적인 변화가 동반되고 결국엔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변화를 불러일으킬지 모르기 때문이다.

기후변화에 있어서 지구의 대기 온도 상승은 아주 중대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온도가 올라가면 여러 가지 다양한 동식물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활에도 아주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구대기 중 대표적인 온실기체인 이산화탄소의 농도 변화를 관측하는 건 아주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대기과학을 전공한 대기 대원으로 월동대에 합류했지만 10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후변화를 심각하게 느끼고 있다.

백만분의 1 아니, 그 이하의 아주 적은 양의 변화를 관측하기에는 지구상에서 남극만큼 깨끗한 곳은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나라는 극지연구소를 통해 남극에 2개의 과학기지(세종, 장보고)를 운영하고 있고, 세종과학기지에서는 온실기체를 관측하고 있다.

세종과학기지가 있는 남극 반도와 남쉐틀랜드(South Shetland Islands) 군도 지역은 기후변화가 가장 크고 빠르게 관측되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하루 기후변화의 최전선에서 남들은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아주 작은 수치를 관심 있게 그리고 심각하게 지켜보고 있는 남극세종과학기지의 대기과학 연구원이다.

-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글쓴이 : 오영식(남극세종과학기지 제38차 월동연구대 연구반장) / 오영식 작가의 여행 내용은 블로그와(blog.naver.com/james8250) 유튜브(오씨튜브OCtube https://www.youtube.com/@octube2022) 등을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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