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C는 기획시리즈로 [예·탐·인](예술을 탐한 인생)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이 특집 기사는 동시대 예술가의 시각으로 바라본 인간과 삶, 세상의 이야기를 역사와 예술의 관점에서 따라갑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소통을 기대합니다. <편집자 주>
◇ 도시락 싸들고 도서관 나와 책 읽어
문향선 작가는 1945년 평안북도 신의주에서 태어나 주로 광주광역시에서 살아온 이제 곧 80살을 바라보는 나이의 이름난 독서가입니다.
문 작가는 글사랑 독서회가 창립된 지 3년이 되는 1995년, 52살의 나이로 독서회에 들어왔습니다.
전업주부이던 시절이었고, 집도 무등도서관에서 가까워 직장인처럼 도시락을 싸들고 와서 책을 읽었다고 합니다.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의 매일 도서관에 갔습니다.
그래서 종종 사람들은 문 작가가 도서관 직원인 줄 안다고 합니다.
도서관에 신간이 들어오면 단연 문 작가가 첫 독자입니다.
지인들은 문 작가를 통해 다산 정약용 선생을 만났다가 짜라투스트라를 만나기도 하고 베토벤을 만나고 고갱과 히틀러도 만나는게 다반사입니다.
동서양을 망라하고 예술과 철학과 역사서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책을 읽는 문 작가는 움직이는 박물관, 움직이는 백과사전인 셈입니다.
명절만 빼고 도서관에서 파고 살았다고 합니다.
코로나가 터지기 전까지는 매일 도서관에 출근해 책을 읽었으니 문향선 독서가가 무등도서관 독서왕이 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이 독서가가 30년 동안 이틀에 한 권씩만 읽었다 쳐도 5,400여 권은 읽었을 것입니다.
한글을 뗀 5살 무렵부터 '간서치'였으니 무려 75년째 독서 중인 것입니다.
60대 중반에는 허리협착증이라는 직업병(?)이 생겼는데 도서관 의자가 당시만 해도 독서하기에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 책이 인생의 모든 것인 지독한 독서가
책벌레 문 작가는 1990년 '문학과 의식' 수필 부문 신인상으로 등단했습니다.
그리고 가교문학동인회, 광주문인협회, 글사랑독서회, 서음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 '오래된 시계',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가 있습니다.
'오래된 시계'는 수필가로 등단한 이후 쓴 수필 모음집이고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는 읽었던 책들 중에서 독후감을 써두었던 것을 모은 책입니다.
'독서일기'에서 저자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내 모든 곳에서 쉴 곳을 찾았으나 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나은 곳은 없더라라는 A. 켐티스의 말을 음미해보곤 한다. 내 방에서 잠자고 글 쓰고 책을 보며 음악을 듣는다. 벌레처럼 움츠리며 동면해도 좋을 그런 방이다. '지상의 방 한칸'을 위해 이만큼의 세월이 흘러가 버리지 않았는가."
'도서관에서'라는 글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언젠가 이 세상과 하직하는 날이 다가올 것이다. 책과의 결별도 그때 비로소 이루어질 것이다. 책과의 이별이 무엇보다도 섭섭할 텐데 시간이 갈수록 매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
문 작가는 독서 때문에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포기했고, 독서에 지장을 주는 일이라면 아예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책이 인생의 모든 것인 지독한 독서가의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 오디오북으로 단편소설과 추리소설 감상
문 작가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무등도서관의 책상이 아니라 '지상의 방 한칸' 집에서 책을 읽습니다.
눈의 힘으로 독서를 하는 것인데 돋보기를 쓴 지금은 3~4 시간 더 이상 책을 읽을 수 없어 책을 읽다 쉬다가, 다시 책을 들고 독서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오디오북으로 잠 속에서 단편소설과 추리소설을 듣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오디오북의 이야기가 꿈 속에서 재현되어 놀라 잠을 깬 적도 한두 번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책을 읽다가 잠들 듯이 운명을 다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문 작가의 책 '어느 책 읽는 사람의 이력서'에는 '간서치의 변'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나를 괴물이라고 해도 나는 오로지 책만 읽었다. 무엇이 그리도 나를 몰입하게 했을까, 거기에 답변할 수는 없다. 그저 그렇게 타고 났을 뿐이다."
"현대인들은 2만 가지가 넘는 살림살이를 소유하며 산다고 한다. 옛날 인디언의 어느 종족은 25가지만 가지고 잘 살았다고 한다. 여백을 잃어버리고 살림들로 채워진 집들을 보면 놀라울 뿐이다. 정신의 세계가 가난한 사람들의 살림살이다."
◇ 유년시절부터 책 끼고 살아온 독서광
어린 시절부터 책을 좋아했고 경찰 아버지의 여러 곳의 임지를 따라다니던 형제들이 8명이었는데 그중 맏이였습니다.
경찰서나 관사에는 '민주경찰'이라는 잡지가 항상 비치되어 있었습니다.
5~6살 이제 막 글을 깨친 첫 번째 독서 목록이 바로 '민주경찰'이었고 그 시절의 수사 비화는 흥미진진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 전남 영광에서 광주로 이사하여 살면서 초등학교 때는 교과서를 너덜너덜 헤지도록 읽었습니다.
친구들이 운동장에서 공놀이 고무줄놀이를 할 때 혼자 교실에 남아 교과서만 읽던 아이가 바로 문향선이었던 것입니다.
광주조대여중을 다닐 때는 동네의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다 봤습니다.
교과서건 참고서건 빌린 책이건 닥치는 대로 읽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선생님들은 "학기 초에 교과서를 독파해버리는 문향선 좀 닮아라", "너는 의사가 되도 좋은 의사가 될 거야"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갈 나이에 직장에 다니면서 월급의 절반 정도는 책을 사 읽었고,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책을 대여해 가는 독서왕이 되었습니다.
결혼을 하고, 남편과 자식들을 건사하면서도 간서치의 독서열은 식을 줄 몰랐다고 전합니다.
약속 장소에서, 버스를 기다리면서, 병원에서 의사가 호명하기 전까지 책을 읽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해외 원정 등반을 나갈 때도 비행기 안에서 고소공포증을 잊으려고 책을 읽었다고 하니 문 작가의 독서는 삶이고 종교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이 기사는 2편에 계속됩니다.
#광주 #독서왕 #문향선 #책읽기 #책벌레
댓글
(0) 로그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