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인 별난 이야기(남·별·이)'는 남도 땅에 뿌리 내린 한 떨기 들꽃처럼 소박하지만 향기로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고자 합니다. 여기에는 남다른 끼와 열정으로, 이웃과 사회에 선한 기운을 불어넣는 광주·전남 사람들의 황톳빛 이야기가 채워질 것입니다. <편집자 주>
제가 먼저 이곳에 누울 줄 알았다면
당신 등 뒤에 풍경소리라도 남기고 올 걸
초분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없어 더 아픕니다
(서애숙, 죽림 풍장 53 中)
이 시는 전남 목포 출신 서애숙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죽림 풍장』 연작 53번 작품 중 마지막 연입니다.
서 시인은 '풍장(風葬)'이란 한 주제를 붙들고 20년간 매달렸습니다. 모두 140편을 썼는데, 102편을 시집 한 권에 담았습니다. 그중 53번 작품은 1년에 걸쳐 수 차례 고쳐쓰기를 거듭한 끝에 완성되었습니다.
◇ 수 차례 고쳐쓰기를 거듭한 끝에 완성풍장은 진도를 비롯한 전남 섬 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장묘 문화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치른 후 곧바로 땅에 묻지 않고 시신을 3년간 짚이엉으로 덮었다가 뼈만 남으면 이를 추려서 매장하는 방식입니다.
지금은 전통 공동체 문화가 사라지고 화장이 일반화되면서 더 이상 풍장을 볼 수 없습니다.
서 시인이 죽음이라는 서늘한 기운이 감도는 풍장에 꽂힌 이유는 유년 시절의 강렬한 기억 때문입니다.
그녀의 외가는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였는데 틈틈이 목포와 외가를 오가며 자랐습니다. 그리고 외가에 지낼 때 상여 나가는 모습과 들판에 짚으로 덮인 풍장 묘(초분)를 스스럼없이 접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풍장은 어렸을 때 실제로 봤습니다. 진도 죽림리 바닷가에는 '초분골'이라는 곳이 있었는데 어른들은 무서워서 꺼리는 곳이지만 우리는 그곳에서 즐겁게 놀았죠. 시퍼런 바닷물이 아름다웠고 전복과 해초가 무수히 널려 있었어요."
◇ 어린 눈에 무서움과 호기심 스며들어또한 "죽림리는 씻김굿 판이 밤새 벌어지곤 했는데 한쪽 귀퉁이에서 밤 지샌 줄 모르고 지켜봤었죠. 무당이 작두에 올라 신대를 흔들며 망자의 목소리를 낼 때 무섭고도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유년 시절 목격한 죽음의 의례는 어린 눈에 무서움과 더불어 호기심으로 스며들었습니다.
그 후 어머니의 형제 10명 중 9명이 죽고 모친만 남은 데다, 자신도 2남 1녀의 형제 중 한 명이 먼저 세상을 떠나면서 의식 속에는 죽음의 서사가 꿈틀거렸습니다.
이토록 켜켜이 쌓아 올려진 죽음의 서사는 그녀의 가슴 속에 옹이로 박혀 무의식 세계를 억누르며 힘들게 했습니다. 그녀는 "어찌나 풍장의 기억이 강렬한 지 시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어요, 숨을 쉴 수가 없었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망자를 저승으로 떠나보내는 씻김굿을 하듯 한 편 한 편 써 모은 것이 '죽림 풍장' 연작시로 탄생 되었습니다.
광주에서 발행되는 계간 문예지 '시와사람'에 첫 번째 풍장 시를 발표한 이후, 스무 해 성상을 스스로 망자의 혼이 되어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며 가슴 속 저편에서 떠오른 문장들을 길어 올렸습니다.
◇ 논산 조용한 작업실에서 명상하며 집필'죽림 풍장'을 쓰기 위해 충남 논산 한적한 곳에 마련해둔 집에서 명상하며 작업을 해왔습니다.
그녀는 "밤새 시를 쓰면서 무섭기도 하고 여러 번 울기도 했다"고 말했습니다.
『죽림 풍장』 연작시를 본 시인들은 한결같이 '산 자의 목소리가 아니라 망자의 목소리'가 들린다는 반응을 나타냈습니다.
이 시집을 출판한 '문학과경계' 이진영 시인은 "망자의 혼이 스며들지 않고는 이런 시가 나올 수 없다"고 평했으며, 김준태 시인은 "귀신이 씌어서 쓴 것 같다"고 말했다고 밝혔습니다.
독자들 또한 '이 시집을 읽으면 무섭고 너무 슬프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말했습니다.
전북 정읍에 사는 한 독자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얼마 안되어 이 시집을 접했는데 밤새 읽고 울다가 또 읽고 울고 세 번이나 읽었다"고 전했습니다.
반면에 회갑을 기념해 이 시집을 출간했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이제 망자의 혼에서 풀려나 모든 고뇌를 떨치고 편안하게 살아갈 것이다"라고 덕담을 건넸다고 전했습니다.
시집 표제는 처음에는 '풍장'으로 하려 했지만 1995년에 나온 황동규의 시집 '풍장'이 있어 죽림이라는 마을 이름을 붙여서 '죽림 풍장'으로 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서애숙 시인은 "내가 죽어서 누군가 풍장으로 장례를 치러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고 풍장 문화에 대한 각별한 의미를 피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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