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에 물들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
5월 광주의 기억을 가장 명징하게 표상해 온 나종영 시인이 신작 시집 『물염의 노래』(문학들 刊)를 출간했습니다.
올해 고희를 맞은 시인은 2001년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이후 23년 만에 침묵을 깨고 두 번째 역작을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시집 표제 '물염(勿染)'은 '세속에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꼿꼿한 선비의 기개와 결기가 담겨 있습니다.
◇ 물염(勿染)은 조선시대 선비 송정순의 호물염(勿染)은 조선시대 구례군수와 풍기 군수를 지냈던 송정순(1521~1584)의 호(號)로, 전남 화순군 이서면 창랑리 화순적벽에는 그가 지은 '물염정(勿染亭)'이 있습니다.
시인은 어느 날 그 정자에 가서 혼탁한 세상에서 '세속에 물들지 않는' 참다운 길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습니다.
"그대는 홀로 어디쯤 닿고 있는가? 세상 어느 것에도 물들지 않는 물염적벽에 그대는 칼끝을 세워 청풍 바람 소리를 새기고"(물염정에 가서)라고 비장한 심정을 투영합니다.
나종영 시인은 '시인의 말'에서 "그동안 나는 그냥 시를 쓰는 사람보다도 한 사람 '시인'으로서 시대를 살아오기를 염원해 왔다. 사물과 사람에 대한 사랑, 겸손, 겸애와 더불어 이 훼절의 시절에 세속에 물들지 않는 시인이 되고 싶었다"고 언명하였습니다.
이번 시집에서 그는 광주의 아픔과 진실을 밝히려는 초기 시 이후 분단된 민족문제와 참담한 민중 현실 그리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경외를 보듬어 안으며, 더욱 깊고 넓은 시 세계를 펼쳐보이고 있습니다.
◇ 더욱 깊고 넓은 시 세계를 펼쳐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있는
빈속의 대나무도
몇 번은 둥글게 휘어져야
제 몸의 마디를 지킨다
그 청절한 마디마디의 힘으로
불의에 꺾이지 않고
땅속 깊이 뿌리를 뻗어
비로소 한 생명을 피워 올린다
저 산이 울면 대나무는 죽창이 되고
저 강이 울면 어린 죽순도 화살이 된다.
(시청죽靑竹전문)
휘어짐으로써 마디를 지키고 뿌리를 뻗어 한 생명을 피워올린다는 청죽의 자세는 여린 꽃잎 앞에서 사랑을 위해 무릎을 꺾고 그 꽃잎의 그늘을 어루만지는 자세와 다르지 않습니다.
시인에게 꽃은 '상처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꽃은
이 세상의 모든 꽃들은
상처의 다른 모습인지도 모른다
꽃은
꽃잎의 이면에 비밀스레 감추어진
눈물샘과 아린 상처로 인해
꽃들은 더 아름다운지도
모른다
(시꽃은 상처다 中)
이처럼 사물과 세계에 대한 시인의 따스하고 겸허한 자세는 풀, 꽃, 나무, 숲, 깡통, 연탄, 촛불, 노을, 별 등의 사물과 교감하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궁극적인 가치가 무엇인지를 숙고하게 해줍니다.
◇ 5·18 민중항쟁 직후 결성된 '5월시' 동인
또한 5·18, 4·3, 세월호, 용산역 참사와 같은 불의한 사건들을 어떻게 응시하고 실천해야 할 것인지를 깨닫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집은 "'가난한 세월'에도 물들지 않는 '물염의 시'"(정희성 시인), "억압받는 민중과 함께하고자 하는 유교적 선비의 자세"(임동확 시인), "오래 묵고 벼린 말(言)로 된 사리"(김형중 평론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나종영 시인은 1980년 5.18 민중항쟁 직후 결성된 '5월시' 동인 중 한 명입니다.
'5월시'는 군부독재의 폭압 아래 다수의 문인들이 침묵하고 있을 때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결성된 시 동인지로 이른바 1980년대 '무크 붐'을 일으키며 한국문학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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