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비씨]4.19는 비폭력 항쟁, 5·18은 폭동?

작성 : 2019-05-16 21:04:03

4.19혁명은 비폭력 항쟁, 5·18은 폭동이었다?
5·18 당시 무기고 습격에 대한 비판과 억측
하나씩 답변 드리겠습니다.

[깨비씨 유튜브에서 다시보기]
https://bit.ly/2LWCsNY

 

5.18 가짜뉴스 바로잡기!

벌써 6번째 시간이 됐는데요.

 

정말 많은 분들이 저희와 뜻을 함께 해주시고,

격려를 보내주고 계십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반감을 드러내는 분들도 있는데요.

 

“4.19때는 민중들이 무기를 들지 않고 맨몸으로 총칼 앞에 섰기에 길이길이 역사에 남는 것이고 우리가 기억하고 그 정신을 계승해야하지만 518은 말 그대로 무장폭동이 팩트다 왜곡 선동질 하지마세요

 

요약하자면, 4.19혁명은 비폭력 항쟁이었으므로,

5·18과 비교 대상이 아니다, 라고 주장하는 건데요.

 

[4.19 혁명]이란 책의 한 대목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일부 시위대는 눈에 띄는 차량들을 닥치는 대로 징발, 차에 올라타고 경찰로부터 탈취한 몇 자루의 소총으로 무장한 채 길을 누볐다. (중략)

시위대는 밤 8시 경, 파출소를 모조리 불질렀으며, 파출소에서 탈취한 카빈 소총 27정으로 무장, 한 때는 경찰과 총격전까지 벌였다

- 김정남, 4·19혁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3, 84페이지 -

 

무기고를 습격했다는 기사도 여러 갭니다.

 

경북 김천에서는 27일 새벽, 일단의 학생 및 군중들이

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해 카빈총 7정과 권총 1정을 탈취했다고

나오고요.

 

심지어 경남 마산에서는 시민들이 무기고에서 탈취한 수류탄을

경찰서장실에 투척해 폭발시켰습니다.

 

4.19 당시에 있었던 일들입니다.

 

무기고 습격

카빈 총기 및 권총 탈취

탈취한 총기로 경찰에 총격

수류탄 탈취 후 경찰서장실에 수류탄 투척

군용 트럭 탈취 및 탱크 점거

소방차, 파출소 방화

 

5·18을 폭동이라고 주장한 요건과 딱 들어맞는데요,

 

폭력과 비폭력으로 두 사건을 구별 지을 수 있을까요?

 

또 다른 분의 댓글입니다.

 

광주방송은 그냥 대답하라!

시민이 무기고 습격 불법이냐 정의로운 것이냐?

시민이 정예부대 불시 습격 무기탈취, 군인구타

불법이냐? 정의냐?

시민이 자동차공장습격 자동차 탈취 불법이냐? 정의냐?

시민이 교도소 무장습격 불법이냐? 정의냐?

시민이 도청,방송국 무장습격 불법이냐? 정의냐?

이 물음에 답변을 하라!“

 

하나씩 답변 드리겠습니다.

 

먼저, 시민들의 무기고 습격에 대한 비판과 억측들이 난무한데요.

주로, 521일 새벽 시민군이 세무서 예비군 무기고에서

총기를 탈취했으니, 시민군이 먼저 발포한거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2군 계엄상황일지에는

실탄은 31사단에 보관이라고 명시돼 있습니다.

시민들은 그저 빈 총을 들고 있었던 겁니다.

 

실제로 총을 먼저 발사한 건 계엄군입니다.

520일 밤 11시쯤, 광주역 앞에 있던 3공수여단은

31사단과 전교사의 허가도 받지 않고 시민들에게 총을 쐈는데요.

 

이 때 비무장 시민 두 명이 죽었고,

이를 뒤늦게 안 계엄사령부에서는

긴급회의를 거쳐 다음날 새벽 4! 자위권 발동을 허락합니다.

 

한편, 전두환은

시민군의 무기고 습격이 오전에 있었다고 수차례 밝혔는데요.

 

"<5>2110:00경 난동분자 4명이 탄 짚차를 선두로 뒤따라 4~50명이 GMC에 분승하고 파출소 앞에 이르러 뒤따라오던 GMC가 파출소 안으로 돌진, 기물을 파괴하고"

- 전두환회고록 1p.403

 

<5>2110:30경 영암지역으로 들어오자마자 길목에 있는 영암경찰서 신북지서 예비군 무기고에 들어가 무기를 탈취한 것입니다.>"

- 전두환회고록 1p.403

 

반드시 오전이어야만 21일 계엄군의 발포가 자위권 차원이었단

그동안의 주장이 설명이 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2년 전,

전남경찰은 기록이 조작됐다고 발표했습니다.

 

문건 제목의 한자부터가

경계할 경() 대신 공경할 경()으로 잘못 적혀 있었고

내용도 당시 경찰 타자기에는 없는 활자체로 작성돼 있었다는 거죠.

 

대신, 예비군 무기 탄약 피탈 상황 문건을 통해

집단 발포가 있은 후인,

1330! 나주 남평 지서에서

최초의 무기 탈취가 있었다고 밝혔습니다.

 

, 나주읍 금성동의 피탈 시간은 1430분으로 기록돼 있는데요

이를 뒷받침한 증언도 있습니다.

 

(인터뷰) 염행조 / 805월 당시 나주서 보안과 소속

금성파출소 무기고는 제 기억으로 약 오후 한 2시쯤에 그 때 무기고가 털렸습니다. 왜 오후 2시냐면 제가 나주경찰서에 그 때 당시 오전에 상황실 타격대장 직무대리로 20일 저녁부터 근무를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가 오전에 각 지서에 전체를 다 확인을 했습니다. 이상 유무를.”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금성파출소의 총기 탈취 시간은 14시로 나옵니다.

 

오후 1시 반, 2, 2시 반.

저마다 기록은 다르지만 어디에도 '오전'에 공격당했다는

경찰이나 군 기록은 없습니다.

 

, 지만원 씨는

시민군이 군사 기밀 장소인 무기고를

단시간에 44곳이나 습격한 건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란

해괴한 논리를 펼치는데요,

 

19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 무기고에 보관돼 있었습니다.

 

5.18 유적지로 지정된

나주 금성파출소 무기고도 대로변 바로 옆에 위치하는데요,

이를 군사적 기밀 장소라는 수사를 이용해서 포장하려는 건

시민군을 어떻게든 불순세력과 엮어보려는 비열한 의도입니다.

 

, 지만원 씨는 당시 시민군이 어떻게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겠냐며 의문을 제기합니다.

 

물론,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했던 건 사실입니다.

그 때 사용한 장갑차가 KM900입니다.

 

KM900은 일반 트럭이나 일반 차량을 장갑차화한 것으로,

일반 자동차와 운전 방식이 거의 같습니다.

 

시민군이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단 주장도 있는데요.

 

당시 다이너마이트 설치를 담당한 사람들은

호남탄좌 화순광업소에 근무하고 있던 김영봉 씨 등

모두 13명이었습니다.

광업소에서 근무하던 분에게 다이너마이트 설치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요.

 

5.18 正史에 기록된 신만식 씨의 증언입니다.

 

"떡밥과 뇌관 결합작업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진 않았다. 형식적으로 다이너마이트 인근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뒀을 뿐이다. 애초부터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이었지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민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위 증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이너마이트는 단순 위협용이었습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는 주장도 요즘 들어 부쩍 확산되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일베식 주장입니다.

 

1982년 신군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서적 계엄사에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117명이

시민군이 사용한 카빈 소총에 의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는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인터넷에서 떠도는 다음과 같은 도표도

같은 서적에서 나온 겁니다.

 

반면, 80516일부터 619일에 광주지검이

작성한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을 보면,

 

M1696, 카빈 소총 26, 기타 총상 9명입니다.

 

검찰이 굳이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 숫자를

축소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2007년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보안사 주도의 사체검안위원회는

505보안부대에서 파악한 사체 검안 자료를 가지고

사망자 167명을

다음과 같은 기준을 갖고

양민과 난동자(원문에는 폭도와 비폭도)로 분류했습니다.

 

당시 의사 2명과 목사는 난동자(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비폭도)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인터뷰) 이재의 /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저자

“M16에 의해서 희생당한 사람은 군인에게 저항해 폭도라고 봤고 카빈 희생자들은 민간인들끼리 오발사고로 죽었을 것이다, 그렇게 가정을 했던 것이죠. 한 사람이라도 더 보상을 받게 해주자 그때 그런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억울한 희생자들이 많다는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에 군 당국에서도 그러다 보니 카빈 소총으로 희생당한 사람 숫자를 엄청 늘렸던 겁니다. 처음에 압도적으로 M16보다 많았던 것이죠

이같은 이유로,

M16보다는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대표적인 왜곡 사례 중 하나가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건데,

광주교도소 폭도 기습, 피아 교전에서 시작된 유언비어입니다.

 

당시, 시민군들은 담양과 장성에 시민들의 피해를 알리기 위해

교도소 앞 차단을 뚫어야 했고,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에 맞서기 위해서

교도소 앞으로 출동했을 뿐입니다.

 

이미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아가기 위해

관련자를 조작했음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광주교도소는 민간인 학살이 빈번하게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불순분자들의 선동에 따른 폭도들의 습격을 격퇴한 것으로 설명됐다

- 2007.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 94

 

오히려 신군부는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계엄군들은 외곽봉쇄지역에서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했고, 외곽지역에서는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 2007.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 보고서 94

 

이런 해명에도 불구하고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폭동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을 파괴하는 주장입니다.

 

4. 19 혁명 때는 경찰서가,

6. 10 항쟁 때는 파출소와 버스가 불탔습니다.

 

그렇다고, 4. 19혁명과 6. 10항쟁이 폭동입니까?

4.19혁명을 계승한 헌법도 부정하실 겁니까?

 

(인터뷰) 박용수 / 5·18연구소 전임연구원

“5·18을 왜곡하고 폄하하고 날조하는 세력들은 무차별적입니다. 어떤 근거를 갖고 하는 게 아니라 자기가 필요한 부분을 어디서든지 발췌를 해서 임의로 조작하고 왜곡하고 있기 때문에 철저하게 정치적 저의가 있다는 것이죠. 광주를 고립시키고 광주를 차별하고 국민들로부터 고립무원의 상태로 역포위 하는.. 어떻게 보면 5·18 역사 쿠데타가 진행중이다

 

“5·18 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의 전환점이다.

동아시아 국가의 민주화를 이루는 데 기여했고,

나아가 냉전 체제를 깨뜨리는데 도움을 줬다.“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유네스코의 평가입니다.

 

기획·구성 김태관 / 출연 정의진 / 편집 전준상 / 그래픽 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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