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C는 기획시리즈로 [예·탐·인](예술을 탐한 인생)을 차례로 연재합니다. 이 특집기사는 동시대 예술가의 시각으로 바라본 인간과 삶, 세상의 이야기를 역사와 예술의 관점에서 따라갑니다. 평생 예술을 탐닉하며 살아온 그들의 눈과 입, 손짓과 발짓으로 표현된 작품세계를 통해 세상과 인생을 들여다보는 창문을 열어드리게 될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성원과 소통을 기대합니다.<편집자 주>
“이제 나이 70을 넘어서니 흙 빚는 일에도 종종 힘이 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도 옹기는 도자기의 시작이면서 마침표입니다. 흙 다루는 기술이나 불 때는 작업이나 또 쓰임새에 있어서도 한국 옹기는 세계 최고입니다.”
옹기의 가업을 잇고 있는 이학수(1955~) 장인입니다. 그는 지금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전수교육 보조자에 올라 있습니다.
청년기에 문학도의 꿈을 키웠던 그는 돌연 가업을 잇기로 마음을 돌려 먹은 이후 지금까지 50여년 가까이 한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전남 보성군 미력면 ‘미력옹기’는 사실상 전라도 옹기의 본산입니다. 9대에 걸쳐 300여 년 동안 물레를 돌리고 가마불을 때며 전통을 지켜왔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10대를 이어가는 ‘옹기명가’의 탄생을 앞두고 있을 만큼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친 고 이옥동(李玉童, 1913~1994)씨와 숙부 이래원(李來元, 1919~2000)씨 형제는 함께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제 제96호(옹기장)’였습니다.
대단한 ‘옹기 명문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전통과 기법, 가마를 그대로 전승한 이학수씨는 이미 ‘옹기 명인’으로 평판이 자자합니다.
물론 본인은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자세를 낮추기에 바쁩니다. 볼 때마다 “나는 그저 물레 돌리는 재미에 산다”며 고요한 미소만 날릴 뿐입니다.
원래 미력옹기는 300여 년 전 조선 후기에 전남 강진군 병영면에서 태동했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250여 년 동안 6~7대를 이어오다 1950년 흙과 나무를 찾아 보성으로 들어왔다는 겁니다.
처음엔 보성군 노동면 금호리에 자리 잡았다가 다시 미력면 도개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보성에서는 3대째 옹기가마를 이끌어 가고 있습니다.
◇ 가마불 유혹에 마음 뺏기다
작은 옹기에서부터 커다란 독에 이르기까지 쑥쑥 낳았던 가마와 공방은 이학수씨의 유년시절 놀이터였다고 합니다. 자연스레 흙 만지는 놀이에 빠져들었던 그에게는 성장기를 거치며 장인의 기질이 몸과 마음에 스며들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특히 7일 동안 밤낮으로 가마에 불이 지펴지면 자신도 모르게 불꽃의 환상적인 아름다움에 매료되곤 했다고 합니다. 깊은 밤 장지문 사이로 너울거리는 불꽃을 보며 그 속에 마음을 뺏겼던 그는 “나중에 큰 항아리를 빚고 구워 내는 일을 꼭 해 보겠다”는 다짐을 하곤 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옹기 작업에 뛰어들 당시는 플라스틱과 스테인레스에 옹기가 밀리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워낙 자신이 좋아서 택한 일이었기에 세상을 탓할 겨를도 없이 옹기에만 매달렸습니다.
◇ 전통 맥 이은 ‘미력옹기’ 대중화
1976년 가정을 꾸리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간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기술과 기법을 토대로 옹기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고문헌을 찾아 익히고 뒤늦게 대학원에 진학해 이론적 토대도 충실히 쌓아 나갔습니다.
전라도 옹기의 전통은 물론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미력옹기’의 새로운 체계를 세우는 데 전력한 것입니다.
장인 정신과 예술관에 세월의 무게가 더해지면서 ‘미력옹기’와 ‘옹기장 이학수’에 대한 세인의 관심도 점차로 커지게 되었습니다.
때마침 의식주 생활에 웰빙 바람도 불었고 수작업에 잿물옹기를 고집한 친환경 방식이 알려지면서 세상과의 소통도 빨라지고 넓어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1987년 전국 옹기실태보고서가 발간돼 옹기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어 1990년 부친과 숙부가 ‘국가지정 무형문화재(옹기장)’으로 지정되면서 그 위상과 품격이 더욱 향상됐습니다. 이에 그는 미력옹기 전수자가 되어 더욱 활동의 보폭을 넓혀갔습니다.
이렇게 하여 전국 공모전의 입상은 물론 초대전이나 특별전시회 등을 통해서도 옹기장 이학수와 미력옹기의 명성은 쌓여 갔습니다.
1991년 덕수궁에서 열린 옹기문화전에 출품해 호평을 받은 데 이어 같은 해 문화부 기획의 ‘무공해생활옹기특별전’에도 출품했습니다.
이어 1993년 문화체육부 후원으로 롯데월드민속박물관에서 마련된 ‘무공해 전통생활 옹기 특별전’에 나가 전라도 옹기의 진면목을 확인시켜 줬습니다.
◇ 이론과 실무 겸비한 ‘옹기박사’
이학수씨는 국내의 권위있는 공모전을 통해서도 객관적인 역량과 기능, 전문성을 평가받았습니다. 1992년 제17회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질그릇’을 출품해 특별상을 수상하는 등 세 차례에 걸쳐 특별상을 수상했습니다.
마침내 1997년에는 제4회 대한민국도예대전 대상을 수상하면서 자타가 공인하는 ‘옹기명인’의 반열에 올라앉게 됐습니다.
이에 앞서 1994년 10월 31일 부인 이화영씨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96호 옹기장 전수자로 지정받기도 했습니다.
중앙대 국문학과를 중도 포기했던 그는 늦깎이로 광주대 산업교육과와 단국대 대학원 도예과를 마친 도예 전문가로 자신의 길을 탄탄히 다져왔습니다.
그는 “비록 선대 때는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됐지만 가장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어깨 펴고 자랑을 하지는 못했다”며 “제가 대학에서 옹기 강의를 하고 전통문화인 우리 것, 옹기 알리기를 통해 선대가 만족하지 못한 것을 풀어드리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낀다”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습니다.
◇ 생명ㆍ방부ㆍ정화의 ‘마음 속 아름다움’
전통을 이어온 이학수씨가 더욱 빛나는 부분은 옹기의 창의적 미감을 이끌어 낸 점입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아 옹기작업을 하면서도 나름의 예술성을 추구해 일정 부분의 성과를 낳은 것입니다.
그는 평소 옹기와 같은 작업을 하는 데는 가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조로부터 물려받은 기능과 기술에 당대의 창조성이 더해져 바로 장인정신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옹기의 예술성은 최고”라고 믿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는 무엇보다 기형이 우수하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어깨선이 부른 전라도 항아리야말로 절정의 아름다움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일각에선 투박하고 거친 전라도의 옹기 맛도 나지만 “옹기가 예쁘다”는 지적을 받기도 합니다.
그래도 세월의 이끼가 끼면서 자신만의 진화된 옹기 만들기에 고민해 온 옹기장인 이학수씨에겐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옹기에 대한 그의 철학 한 가운데엔 시각적 형태와 선의 미감을 넘어 만드는 이의 인성이 깃든 ‘마음 속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에 더 무게감이 실려 있습니다.
옹기야말로 가장 자연과 인간에 순종적인 기물이라고 믿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마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손과 발, 온몸을 써서 옹기를 만들어야 인성이 가미돼 ‘꽉 찬 옹기’가 나온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렇게 나온 옹기만이 살아 숨 쉬는 ‘생명성’과 온갖 해로운 것을 막는 ‘방부성’, 그리고 속과 겉의 마음이 하나되는 ‘정화성’을 제대로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미력옹기의 전통이요 명예이자, 차별화된 예술적 가치임을 그는 강조하고 있습니다.
※ 이 기사는 <하>편에 계속 됩니다.
인간에 순종하는 옹기, 자연이 준 선물
9대째 300여 년 이어온 전라도 ‘옹기명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전수
생명ㆍ방부ㆍ정화의‘마음 속 아름다움’표현해
9대째 300여 년 이어온 전라도 ‘옹기명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96호 옹기장 전수
생명ㆍ방부ㆍ정화의‘마음 속 아름다움’표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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