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조 칼럼]‘문화슬세권’과 광주 ‘충장22’

작성 : 2023-06-12 10:51:47
▲시민 누구나 문화를 쉽게 가까이서 즐기고 누리는 행사와 사업들이 관심을 끌고 있다. 사진은 지난 6월8일 열린 ‘충장22’ 비전선포식에 참석한 시민들이 식전 공연행사를 함께 즐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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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을 먹고 나면 허물없이 찾아가/차 한잔을 마시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입은 옷을 갈아입지 않고/김치 냄새가 좀 나더라도 흉보지 않을 친구가/우리 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좋겠다//

비 오는 오후나, 눈 내리는 밤에도/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좋을 친구/밤늦도록 공허한 마음도 마음 놓고 보일 수 있고/악의 없이 남의 얘기를 주고 받고 나서도/말이 날까 걱정되지 않은 친구가//…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손이 작고 어리어도/서로를 버티어 주는 기둥이 될 것이며/눈빛이 흐리고 시력이 어두워질수록/서로를 살펴주는 불빛이 되어 주리라//…”

유안진 교수가 쓴 ‘지란지교를 꿈꾸며’ 일부이다. 학창시절 바이블처럼 암송하던 유명한 글귀이다. 이 글을 반복해서 읽으며 생각했었다.

나의 인생도 이처럼 ‘좋은 친구’, ‘가까이에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갈망의 기억이 새롭다.

이 시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나의 일상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도록 하기 때문이다.

“허물없이 찾아가”, “우리집 가까이에 있었으면”, “고무신을 끌고 찾아가도”, “마음 놓고”, “걱정되지 않은” 등이 내가 원하는 바이다. 마치 우리들의 속마음을 비춰주는 표현이 편하게 다가온다.

사람은 누구나 바란다. 아무 조건도, 이유도, 시도 때도 없이 다가서고 싶은 상대가 있기를. 이런 갈망은 본성에 가깝지 않나 싶다. 가족 말고 또래 친구가 아니어도 좋다.

나의 말과 시늉을 받아주는 사람을 찾는다. 아주 가까이에 그 사람이 있었으면 한다. 적어도 그런 바람을 갖고 사는 것이다.

그 사람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탓하지 않는다. 나의 수준과 눈높이에 맞춰준다. 나의 출신과 경력과 삶의 방식에 따라준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고 반응하는 대로 좋아해 준다.

그런 사람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그저 곁에 있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지는 것도 이 때문일까. 이렇게 다들 ‘사는 것’ 아닌가 한다.

그렇기에 누구나 바란다. 아주 가까이에 두고 아무 때나, 아무렇게나, 용건 없이 눈길을 보낼 사람. 내 맘대로 말을 걸고 밥 먹고 차 마시고 잡담하는 그런 친구를 원한다.

과연 이 시를 읽고 외우는 숱한 사람들 모두가 그런 친구를 얻었을까 궁금해진다. 그것은 그만큼 ‘그런 사람 찾기가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아무튼 격식과 짜여진 일정, 수준을 따지지 않고 싶다. 편하게 대하고 접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은 것이다.

일도, 취미도, 즐길거리, 관심거리도 ‘가까이에 고무신 신고 가도 되는 것’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내가 보고 싶으면 언제나 전화하고 찾아가도 되는 ‘편한 사람’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여전히….

▲지난 6월 8일 광주광역시 충장로 5가에 자리한 ‘충장22’의 비전선포식 행사를 찾은 시민들의 행사장 관람석을 꽉 채운 광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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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앞서 말한 ‘친구’처럼 ‘문화를 가까이서 아주 편하게 접하게 하자’는 정책을 추진하기로 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 3월 윤석열 정부의 국정목표 ‘대한민국 어디서나 살기 좋은 지방시대’를 이행하기 위해 ‘지방시대 지역문화정책 추진전략’을 발표했다.

특히 눈길을 끈 부분은 한 마디로 ‘동네마다 슬리퍼를 신고 즐기는 문화생활’을 누리게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15분 문화슬세권’ 조성이 그것이다.

‘슬세권’이란 ‘슬리퍼+역세권’의 합성어이다. 슬리퍼와 같은 편한 복장으로 이용할 수 있는 가까운 권역이란 뜻이다.

우선 공공문화시설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는데 초점을 맞췄다. ‘문화도시’ 등 지역 지원 사업과 연계해서다. 지역서점, 카페, 공방과 같은 일상공간에서도 소소하게 문화를 누릴 수 있게 하는 취지이다.

이를 위해 지난해 전국 18개 문화도시에서 3,407곳의 동네 문화공간이 탄생했다. 여기에 2027년까지 약 1만 곳을 조성할 계획이라고 한다.

또 올해 약 80개 지역 중소형 서점의 문화활동 프로그램 운영을 지원하게 된다. 지역 갤러리 및 유휴 전시공간 60여 곳에 다양한 시각예술콘텐츠도 제공한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을 통해 지역별 특색 있는 공간들이 문화공간으로 재탄생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올해부터 인구감소지역은 문화·관광분야 4개 공모사업에서 가점 부여 등 우대를 받는다. 박물관·미술관 운영에 있어 법정 기준을 완화 적용하는 등 정책특례도 받게 된다.

문화환경이 취약한 지역에는 문화 인프라·프로그램·인력 등을 맞춤 지원사업을 펼친다. 또 7개 부처와 협업을 통해 ‘지역활력타운 조성’을 신규 추진해 문화 프로그램 운영 등을 지원할 예정이다.

지역별 문화자원을 활용한 특화콘텐츠 개발을 지원하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유·무형 문화자원인 ‘지역문화매력 100선’을 선정해 국내외에 알릴 방침이다.

내년부터는 지역 문화자원을 활용한 창작·창업을 적극 지원할 것으로 기대된다.

‘로컬콘텐츠 프로듀서’ 지원과 문화분야 인력 매칭 시스템인 ‘지역문화 인재은행(가칭)’을 도입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창의적 인력을 통해 지역의 자립 기반을 다질 수 있을 전망이다.

▲광주 도심의 상징적 상권인 충장로의 활성화를 위해 옛 간장공장을 문화복합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새롭게 출범하는 ‘비전선포식’ 주요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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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광주시민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전해졌다. 문화를 아주 가까이에서 누릴 수 있게 하는 공공기관이 문을 연 것이다.

앞서 언급한 ‘문화 슬세권’과 딱 맞는 문화시설이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았다. 바로 ‘광주 충장22’의 등장이다.

광주의 심장부인 충장로 5가에 위치하여 구도심 상권의 품에 안겨 있다. 이곳은 옛 간장공장 건물이다. 2020년에 광주 동구청이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증·개축해 복합문화공간으로 단장했다.

개관 이후 광주 시민에게도 거의 알려지지 않던 곳이다. 이곳을 대동문화재단이 2023년 6월 1일부터 광주 동구청으로부터 위탁받아 운영하게 됐다.

지난 8일 비전선포식과 함께 본격적인 사업을 펼쳐 나가기 시작해 시민과 언론, 지역문화예술계의 기대와 주목을 받고 있다.

1층에 갤러리카페와 야외공연마당, 2층에 갤러리 및 다목적공간, 사무실, 레지던시, 명인명장 전시장, 3층에 레지던시, 작은 세미나실, 4층에 레지던시, 지하에는 시민 건강체육시설, 옥상에 야외 공연장 등으로 꾸며져 있다.

대동문화재단은 문화예술 전문기획자를 예술감독으로 영입하고 전담 인력도 충원해 배치했다.

앞으로 전시회와 공연, 강연 및 교육, 레지던시, 갤러리 카페 등을 기본적으로 운영하게 된다. 작지만 재미있고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지역문화의 다양한 행사와 사업을 선보일 예정이다.

지역문화와 전통문화 현장을 누벼온 조상열 대동문화 대표는 “전통문화발전을 위해 30여 년간 한 길에 매진하고 있는 문화전문단체답게 그 간의 노하우를 바탕으로 '충장22'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시민들과 함께 하게 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혀 기대를 갖게 했다.

‘충장22’가 주목 받는 것은 두 가지이다. 우선 코로나19 이후 지난 3~4년간 극심한 침체기를 겪고 있는 지역의 골목문화를 되살려내는 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점이다.

또 광주의 상징적인 핵심 상권인 충장로에 문화의 물길을 열어 보려는 것이다. 보다 많은 사람들과 젊은층의 발길이 북적되는 명소로 다시 탈바꿈시키겠다는 것이 두 번째다.

시민들이 물건 사러 왔다가, 또 친구 만나러, 놀러 나왔다가 문화예술도 즐기고 추억도 쌓는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 취지를 잘 살려가길 바란다.

앞으로 인근 10여 분 이내 거리에 있는 아시아문화전당, 광주문화재단, 광주미디어아트플랫폼, 양림동 문화권 등과 연계해 광주의 공공 문화예술의 허브이자 문화플랫폼 역할을 해야할 책무도 안고 있다.

‘광주의 일번지’ 기초 자치단체 광주 동구청과 지역문화 전문단체 대동문화재단이 손잡고 시민을 위한 문화향유의 발전소로 거듭나는 모범 사례가 돼야한다는 점도 잊어선 안된다.

지역의 ‘문화 슬세권’을 활성화해 원도심 충장로의 옛 명성과 활기를 되찾게 하는 것은 더욱 기대를 갖게 하는 대목이다. 필요하면 정부의 ‘문화슬세권’ 정책사업을 끌어오는 것도 좋은 방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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