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품격 높은 국악 관현악의 세계 일궈낸 무대
오랜만에 음악회 나들이를 나갔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수년간 거의 대중 행사장에 가보지 못했었다. 코로나가 해제되고 나서도 프로야구 외에 사람들을 다수 모아놓고 하는 행사가 다시 되살아날 기미가 보이질 않은 이유도 있다.
이번에는 특별히 국악 관현악 연주회여서 기대를 안고 공연장을 찾았다. 지난 7월 25일 저녁 광주예술의전당 대극장에서 열린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제134회 정기연주회이다.
이 악단을 이끌고 있는 박승희 상임지휘자의 취임연주회를 겸해 마련된 이 공연은 ‘평화를 향한 역동과 진혼’이란 주제를 달고 막이 올렸다.
사실 평화, 역동, 진혼 등 이 세 단어는 음악으로 풀어내기에는 다소 무겁고 강하다는 선입견을 갖게 한다.
공연의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평화’일 것으로 예상되지만 역동과 진혼은 의미를 해석하기에 따라서는 삶과 죽음의 상반된 개념을 음악으로 마주해야 한다는 사실에 설렘 반 부담 반으로 객석에 앉게 된다.
박승희 상임지휘자는 자타가 공인하는 현존 최상급 현대 국악인이자 음악인이다. 이달 초 사전 인터뷰에서 그는 고향 광주의 국악관현악 수준을 최고의 경지로 올려놓겠다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낸 바 있다.
‘품격과 기품 있는 국악 관현악’을 목표로 내걸었었다. 물론 그가 걸어온 국악인의 길 내내 이 목표는 처마 끝에 걸어놓고 앞만 보고 달려왔을 터다.
공연장 로비에서 입장 대기를 하는 동안 여러 해 동안 안부가 궁금했던 문화예술계 지인들의 얼굴을 잇따라 마주한 것도 즐거움을 배가 시켰다.
그들 모두가 그 전과 달리 이번 공연과 박승희 지휘자에 대해 기대감을 표시하며 살짝 들떠있음을 느끼게 했다.
◇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의 ‘전과 다른’ 정기연주회
한마디로 이번 연주회는 박승희 지휘자는 물론 단원들과 연주자 모두가 작심하고 무대에 오른 게 아닌가 싶다. 먼저 공연의 스케일이 지금까지 와는 비교될 만큼 커졌다는 점이다.
판이 확 커진 것이다. 연주자의 숫자와 연주곡, 연주시간은 말할 것도 없고, 무대구성, 음향, 조명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고 짜임새 있게 준비를 한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났다.
우선 이날 연주회는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의 정기연주회였지만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 단원뿐만 아니라 광주시립교향악단의 수·차석단원이 객원연주에 함께 나섰다.
또 소리꾼 박애리와 윤진철 명창, 해금연주자 노은아 서울대교수, 정가·가곡의 김병오 악장 등 국내 최정상급의 국악인들이 객원출연진으로 무대를 장식해 주었다.
여기에 광주시립합창단과 대구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콰이어가 합창에 가세하여 200여명의 연주자가 한 무대에 올라 박승희 지휘자의 지휘봉을 따라가는 초대작의 감동을 만들어 냈다.
연주자들의 장르와 전공, 지역의 칸막이를 부수고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 꽉 찬 무대를 연출해 낸 것이다. 이것이 이번 공연의 눈에 띄는 특징이자 성과 중 하나로 꼽혔다.
문화예술의 융·복합시대에 다양한 장르의 예술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보완·보강하며 새롭고 참신한 연주무대를 연출하는 광경이야 흔하게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전통음악인 국악이 그 중심에 서고 양악과 합창이 끼어들고 감싸 안으며 커져가는, 국악 지휘자의 지휘에 일사불란한 무대를 꾸미는 일은 거듭 신선하고 색다른 시도여서 그 가치와 의미를 남다르게 평가하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번 무대에 올려 진 국악 관현악곡은 모두 6곡이다. 길게는 20분이 넘는 합주곡을 비롯해 곡 하나하나가 각기 다른 느낌과 소리, 분위기를 자아내며 시종일관 관객을 사로잡았다.
2시간 가까이 이어진 이 공연은 무대 뒤 스크린 영상의 기획도 음악의 성격에 맞게 편집한 것으로 보였다. 조명 또한 지휘자의 손끝 움직임에서 벗어나지 않고 철저히 계산된 악보 속에서 빛과 어둠을 쏟아냈다.
◇ 더 깊고 강하고 크게 울리는 감동의 선율
“40년 전 광주시립국악원에서 판소리를 배우던 소년이 지휘자가 되어 고향 무대에 오른 감동적 소회가 너무도 크고 분명합니다.”
진행자 박애리 명창의 소개로 무대에 오른 박승희 상임지휘자의 첫 연주곡은 관현악합주곡 ‘광야의 아리랑’(황호준 작곡).
타악기와 현악기의 두터운 리듬의 질감이 먼 옛날 말을 타고 광야를 누비던 영웅들의 웅대하고 장엄했던 전설을 떠올리는 작품이다.
시작부터 장쾌하고 거침없는 연주로 질주하듯 나아가며 질서 정연한 직조적 구성을 돋보이게 한다.
묵직한 타악기와 부드럽고 민감한 현악기가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하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울려 퍼지는 것이다.
마치 군악대의 절도 있는 끊김과 스타카토 리듬을 연결하듯 이끌어 가다가 곡 후반부에 들어서 대금의 소리는 동화적, 서정적 멜로디로 치환되는 듯하다.
뒤이어 가야금 병창이 이어 받아 가장 국악 연주회다운 분위기를 채워준다. 마지막 사물놀이의 등장은 “밥상에 김치가 빠지면 심심하듯이 역시 국악은 사물놀이야!” 하는 감탄을 다시금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백스크린의 영상도 광야를 달리는 야생마의 이미지를 지나 수직 암벽 사이에 연주단이 들어앉은 것처럼 안개 속의 장중함을 뿜어내어 준다.
광야에서 암벽계곡, 산 바위, 광야로 이어지는 구성도 첫 곡의 이해를 돕고자 연출한 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두 번째 곡 관현악과 첼로를 위한 협주곡 1번 ‘희문’은 어려웠다. 종묘제례악 보태평의 희문에 나오는 음들의 구조를 모태로 한 곡이다.
첼리스트 최승욱 광주시립교향악단 수석과 김병오 악장의 협연은 첼로의 묵직한 선율과 구음의 이질적 거리를 관현악의 다리로 절묘하게 연결해 주는 구성미를 알게 한 작품이다.
사람의 소리가 기악을 지배하면서도 구음과 첼로가 서로 주고받으며 이끌어 가는대로 따라 가다보니 길을 잃어버린 듯 사람을 홀린다고나 할까.
그렇다고 두렵지도 않아서 내 귀와 눈과 몸을 내 맡겨도 될 성 싶은 묘한 감흥이 휘감아 오는 것이다.
세 번째 관현악합주곡 ‘역동의 강’은 파동을 일으키며 수면 위에서 춤을 추는 합주이다. ‘강이 품은 역사 위에서 다시한번 역동성을 가지고 힘차고 활발하게 새로운 역사가 이어질 것’을 기대하며 지난해 초연된 곡으로 알려진다.
전체적으로 세련된 하모니가 가득하고 모든 악기, 모든 소리가 무대 위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시종일관 대북의 장중한 소리가 무대 뒤를 지키며 앞서 가는 악기들을 뒷받침하기에 바쁘다.
여기에 흐르는 음악은 금강변의 야경과 물표면 위로 내려온 별빛들과 버무려져 물 속 수달의 연심이 느껴지도록 화면으로 달궈 준다.
파도가 부딪히고 깨지고 다시 일어나고를 반복하며 마치 갈 데까지 가보자는 심산으로 쭉 이끌었다가 한 획의 지휘로 멈춰 서는 격정이 탄식을 토하게 한다.
네 번째 ‘아리랑 랩소디’는 우리 민요 아리랑을 바탕으로 전통리듬과 서양의 화음을 조화롭게 풀어낸다. 마치 비구상, 추상, 기하학적 문양의 파노라마를 보는 듯하다.
우리 귀에 익숙한 아리랑 선율을 빠른 템포로 구성하고 박승희 지휘자가 천명한 ‘품격과 기품 높은 우리 음악’의 지평을 열어가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작품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다섯 번째 해금협주곡 ‘추상’은 서울대 노은아 교수가 협연한 것으로 흐느끼듯 흐르는 해금의 울음소리에 빈 틈을 메워주듯 기악의 장쾌함을 곁들인 작품이다.
오지 않는 사람을 기다리며 추억하듯 진행되는 독주의 애틋함이 발레 춤을 추는듯 살포시 뛰어 올라 가는 이미지를 그린다.
가을의 시와 편지를 읽듯이 저 홀로 즐거운 박승희 지휘자는 단에 올라 신나게 춤을 추며 객석을 향해 실루엣을 드리운다.
마지막 곡 합창과 진도씻김굿, 국악관현악을 위한 ‘진혼’은 이 공연의 사실상 메인 무대라 할 만 하다.
앞서 말한 윤진철, 박애리 명창과 모든 연주자와 합창단이 한 자리에 올라 장엄한 무대를 연출하고야 만다. 이 곡은 종교를 뛰어 넘어 죽은 자의 영혼을 위로하는 진혼곡이다.
삶과 죽음을 같은 것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온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란 메시지를 던져준다.
이 곡은 관현악과 합창, 판소리가 한 소리를 내어 5·18 희생영령을 위로하는 광주와 대구사람들이 만들어낸 국악 레퀴엠에 다름 아니다.
도입부부터 천상의 소리로 합창이 터져 나오고 거문고의 술대를 튕기면 튀어 오르는 화산의 분화구를 보듯 장엄하고 숭엄하며 뜨거운 에너지를 뿜어내는 장쾌한 협연의 메아리가 휘몰아친다.
이미 관객들은 분화구에 빠져 제 마음대로 숨을 들이 쉬지도 내뱉지도 못할 지경에 이르러서도 온 몸에 전율을 느끼며 환호성을 지른다. 솔직히 최근 30여년 동안 이런 공연 처음 본다고 해야 할까.
서석대 주상절리에 이들의 소리가 부딪혀 더욱 커지고 윤진철, 박애리의 창이 애달프게 고개를 넘어갈 즈음, 스크린에 내걸린 태극기를 바라보고 내가 대한민국 국민임을 다시 깨달으며 가슴 뭉클함으로 울컥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저 연주자들과 같은 시간, 같은 공간, 한 하늘 아래에 숨 쉬고 살아 있고 연주 속에 파묻혀 교감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희열감에 빠져들기도 한다.
오늘에야 비로소 제대로 위령제를 지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곳에 편히 잠드소서…”
◇ 지휘자 박승희의 지휘봉 끝에서 터진 박수갈채
역시 지휘자는 지휘봉 들고 연단에 올라 섰을 때 그의 기품이 드러난다. 박승희 지휘자는 사실 체구가 작음 편인데도 작다는 생각을 할 겨를 이 없다. 매사 적극적이고 긍정적이며 자신의 방향이 분명한 예술가의 풍모를 지녔기 때문이다.
객석에서 그의 지휘하는 모습을 보면 사실 뒷모습만 보게 된다. 그것도 조명 때문에 온통 어두운 그림자 면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찬찬히 보고 있으면 그는 지휘하는 동시에 끊임없이 춤을 추고 있다. 지휘봉 사이로 왼손을 한껏 치켜 올렸을 때는 마치 허공중에 날아오르는 승무의 춤사위 같기도 하다.
그는 “지휘자란 객석의 박수를 연주자들에게 전달해주는 역할을 한다”고 스스로의 책무를 정리해 밝혔다. 모든 공은 단원들과 협연자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정녕 기품 있는 리더십이 아닐 수 없다.
그의 손끝에서 파도가 일어나고, 여인이 흐느끼고, 계곡으로 폭포가 떨어지고, 천둥 번개가 치며, 지축이 흔들리는가 하면 위대한 대곡이 터지는데도 한사코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박승희 지휘자는 공연 후 소감에서 “광주가 우리 전통예술의 낙원이었다”면서 “광주시립국악관현악단이 역동과 새로운 비젼을 가지고 우리 광주시민들이 사랑하는 최고의 예술단체가 되려고 오늘 이 자리에 섰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어 “70여일 만에 정말 대단한 그리고 감동을 주는 작품을 손에 피가 나도, 링거를 맞고 그야말로 무엇인가를 새로 하겠다는 뜻을 가지고 쉼 없이 달려온 우리 단원들께 뜨거운 박수를 보내 달라”며 대성황을 이뤄낸 이번 정기연주회의 공을 단원들에게 돌렸다.
이러한 박승희 상임지휘자의 열정과 노력이 거듭 폭발하듯 퍼져 ‘광주국제평화음악제’ 개최로 이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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