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고전 다이제스트]'재앙을 축복으로 만드는 사람들'.."저는 고민도, 난제도 많은데 어떻게 해야할까요?"
오늘은 <재앙을 축복으로 만드는 사람들 1, 2, 3> 12번째 순서입니다.
현대사회가 다양해지면서 한 개인은 여러 모임과 조직에 속해 수 많은 관계를 갖습니다.
정보기술의 발달로 개인이 사용하고 활용하는 커뮤니케이션 수단도 비약적으로 늘어나면서 숱한 인연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례해서 불안하고 걱정도 많아집니다.
한 개인이 안고 있는 고민과 난제는 과거 농경사회나 산업사회 초기에 비해 굉장히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의 선지식인 김원수 법사의 법문입니다.
△ "여러 가지 분별심이 있어도 하나만 마음 세워서 끝까지 바쳐라"여러 가지 난제가 있습니다.
가정불화도 난제이지만 먹고살기도 너무 힘든데 자식까지도 속 썩이는 상황,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는 바칠 게 너무나 많습니다.
보통은 가정불화에 대고 바치다가, 자식이 속 썩이니 자식 바치다가, 돈 버는 데 바치다가, 그렇게 왔다 갔다하면서 바칩니다.
그런 경우는 어떻게 할까요? 제일 고약한 것 하나에만 대고 바치세요.
부인이라면 남편이 꼴도 보기 싫어서 자꾸 바치다가, 가난이 괴로우면 가난에 대고 바치는데, 이렇게 바치는 대상이 자꾸 바뀌면 마음이 서질 않습니다.
남편이면 남편 한 가지에만 대고 계속 바쳐야합니다.
그러면 가난은 어떻게 해결하는가?
남편 하나에만 대고 편안해져서 그 생각이 안 날 때까지 계속해서 바쳐야 합니다.
가난이 떠오르고 자식이 떠오르고 뭐가 떠오른다고 마음이 자꾸 옮겨갈 때는, 바치는 돈독한 신심이 제대로 서지 않아 해결하기 힘듭니다.
남편, 가난, 자식이 둘이 아닙니다.
너무 욕심내서 동시에 다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만 마음 세워서 끝까지 하십시오.
남편이 속썩이는 것과 가난이 다르지 않듯이 하나에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립니다.
여러 가지 올라오는 생각들을 분별심 또는 아상이라고 합니다.
'나'라는 생각이 아상입니다.
내 몸뚱이를 보호하기 위해서 여러 생각이 나오는데, 이 생각 하나하나는 아상의 그림자입니다.
아상은 쉽게 말하면 생각이고 전문적인 용어로는 분별심이나 번뇌 망상이라고도 합니다.
아상, 생각, 분별심, 번뇌, 망상, 이런 것들은 탐심, 진심, 치심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분별심이 바쳐 질 때 탐심도 바쳐지고 진심도 바쳐지고 치심도 바쳐집니다.
△ "부분과 전체가 둘이 아니다"우리는 깨치는 것만 수도의 목적으로 알고 있을 뿐,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수도의 목적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님들은 깨쳐서 견성 성불하기 위해 불교를 믿고 수도해야 한다고 합니다.
세상을 행복하게 살고 유능하게 사는 것이 수도의 목적이 아니라고 이야기합니다.
가톨릭이나 기독교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가톨릭 신부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평화, 행복, 구원 셋 중에서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 본래 진정한 가톨릭 신자라면 구원을 목표로 해서 믿어야 하는데, 기독교 신자들은(가톨릭 포함해서 기독교 신자라고 얘기합니다.) 구원을 목표로 해서 종교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평화나 행복을 위해서 믿는다. 이것은 잘못된 믿음이다."
불교에서도 스님들께 물어보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세상을 잘살기 위해, 인재가 되기 위해 불교를 믿어서는 안 된다. 깨달음을 위해 믿어야 한다. 세상을 잘살기 위한 길, 인재가 되는 길은 깨달음의 길과 전혀 다르다."
깨닫기만 하면 세상을 잘사는 문제는 동시에 해결되겠죠.
깨달음과 잘사는 길이 다르다고 얘기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은 분별이고 아상입니다.
어서 하겠다(탐)는 것에서 왜 안 되느냐(진)가 나오고 이만하면 되었다(치)가 나온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분별에는 탐진치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생각을 바친다는 것은 탐진치가 동시에 소멸한다는 뜻입니다.
승려는 특히 치심을 닦는 데 역점을 두기 때문에 치심을 깨치면 깨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탐심과 진심을 해결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보고, 치심보다 탐심이나 진심을 닦는 데 중점을 둡니다.
탐심을 닦는다고 해서 진심이나 치심이 닦이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탐심의 세계에 몸담은 세상 사람들은 먹고사는 당면 과제인 탐심을 닦다 보면 탐심이 많이 닦아지고 진심, 치심이 덜 닦아질 수는 있겠지요.
하지만 바치면 다 닦아집니다.
치심을 소멸하여 깨달음을, 탐심을 소멸하여 풍요를, 진심을 소멸하여 능력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깨친 이는 가난해서도 능력이 없어서도 안 됩니다.
깨친 이는 아상을 소멸한 사람이고, 아상을 소멸하면 탐진치도 동시에 소멸하는 것이므로 가난하거나 무능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백 선생님 가르침의 일부분입니다.
△ "부분과 전체가 둘이 아닙니다"부분과 전체가 둘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사는 것과 깨달음의 길을 가는 것이 둘이 아닙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올라올 때 한 가지만 바치면 된다는 것은 부분이 전체와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친다는 것은 분별심, 중생심을 불심과 바꾸는 것입니다.
분별심이 본래 없는 것으로 알고 바치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있다고 믿고 바치면 바쳐지지 않습니다.
난제라고 생각하고 바치면 난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난제가 이미 소멸하였다고 믿고, 감사하면서 바쳐야 합니다.
잘 유념하셔서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 <재앙을 축복으로 만드는 사람들 2> 김원수 지음(바른법연구원)
댓글
(0) 로그아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