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돋보기]황룡강 전망대 '호가정'

작성 : 2025-03-15 09:30:02
조정 간신배들 횡포에 환멸 느껴 낙향
매실나에 배 드나들던 옛 흔적 오롯이
주말 가족 단위 캠핑족들 영산강의 정취 만끽
승촌보 인근 용봉마을, 주막·시장 있던 곳
조선 명종 때 류사가 지은 호가정..영산강 6경 중 하나

▲ 호가정에서 내려다본 영산강

송산공원에서 출발한 '황룡강 30리길' 기행은 어느덧 마지막 구간(전망대~호가정)에 접어들었습니다.

강둑에 설치된 데크 전망대에 올라 망원경으로 두물머리를 바라보니 물새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평화롭습니다.

두물머리에서 합수된 강물은 본덕동 동곡에서 흘러든 평동천과 다시 합류됩니다.

평동천은 영산강으로 합류하기 전에 물길이 오른편 마곡마을 노평산 언덕배기 호가정 등(嶝) 밑을 지납니다.

▲ 호가정(浩歌亭) 전경

등이 휜 소나무 숲에 호가정(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4호)이 운치 있게 자리하고 있습니다.

호가정(浩歌亭)은 조선 명종 때문인 설강 류사(柳泗,1502~1571)가 낙향해 1548년에 지은 정자입니다.

영산강 6경 중의 하나이자 광주·전남 8대 정자 중 하나로 알려졌습니다.

'호가(浩歌)'는 크게 소리내어 노래한다는 의미로 중국 송나라 소강절의 문장 '호가지의(浩歌之意)'에서 따온 것입니다.

호가정에 오르니 마치 옛 선비라도 된 듯 호방한 마음이 솟는 듯합니다.
◇ 소강절의 문장 '호가지의(浩歌之意)'에서 따온 것
설강 선생은 27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를 비롯 여러 벼슬을 거쳐 무장현감, 전라도사, 삭주부사, 종성부사 등을 역임했습니다.

이량(李樑) 일파가 국정을 맡으면서 선생의 명성을 듣고 몇 차례 만나기를 원했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했습니다.

이후 선생은 간신배들의 횡포에 환멸을 느껴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광산 본덕으로 내려와 호가정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설강 선생이 고향으로 내려온 소회는 그의 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 류사 선생 시비

시원한 돌 베개에 솔 그늘 더욱 짙고
바람은 난간을 돌아 들빛이 뚜렷하네

차가운 강물 위의 밝은 달빛 아래
눈을 실은 작은 배가 한가로이 돌아온다

아래는 구강(九江)이요 위에는 하늘인데
늙은이 할 일 없어 세속에 내맡겼네

바빴던 지난 일을 뭣하러 생각할꼬
늦사귄 물새가 한가로이 졸고 있네

▲ 호가정 중수기
◇ 1871년 중건했고, 1933년 다시 중수
호가정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나 1871년 중건했고, 1933년 다시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자 안에는 노사 기정진을 비롯 이안눌, 김성원 등 이름난 선비들이 지은 편액들이 걸려 있어 수많은 유학자들이 어울렸던 교류의 장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호가정 기슭 흔들바위 아래에 매실나루가 있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본덕동을 비롯한 주변의 동곡 주민들은 이 매실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대촌동에 있는 하천답을 경작했습니다.

또 남평장에 가거나 아이들이 대촌동에 있는 학교에 통학할 때도 이곳에서 배를 타고 건넜습니다.

▲ 류사 선생 사적비

호가정 아래 고수부지에는 캠핑장이 조성돼 주말이면 가족 단위 캠핑족들이 영산강의 정취를 감상하며 단란한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호가정에서 3㎞를 내려가면 승천보에 이르고 나주와 경계를 이루는 용봉마을이 나옵니다.

동곡동은 광주와 나주의 접경이었고 경계선을 따라 나지막한 능선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를 '신원등'이라고 불렀습니다.

신장(新場) 장터는 이 언덕 끄트머리쯤에 있었다고 전합니다.
◇ '장미태골'은 장터를 알려주는 지명
'신원등'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초엽 이것에 신원(新院)이라는 주막이 있어서 생긴 이름입니다.

이 주막에 대해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짤막한 언급이 나오며, 조선지지자료에는 평산마을에 신원점이란 주막이 있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평산마을은 용동마을과 합해져 지금은 광산구 용봉동 용봉마을이 됐습니다.

신장은 19세기에 사라졌으나 지금도 장터를 알려주는 지명인 '장미태골'이 본덕 교차로 근처에 남아있습니다.

▲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평동천

송산공원에서 시작한 황룡강 30리길은 여기가 끝 지점입니다.

도로교통이 발달한 현대 사회에서 강의 기능은 예전보다 크게 줄었지만, 생태환경과 휴식공간으로서의 중요성은 오히려 더욱 커졌습니다.

강이 인류문명의 시작점이듯이 황룡강은 광산의 탯자리라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는 여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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