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당시 7공수여단 33대 7지역대장(중위)으로 광주에 투입된 계엄군 고성준(75) 씨는 27일 오후 광주 북구 국립 5·18 민주묘지를 참배하고 사죄했습니다.
진압봉을 사용해 시위 진압 임무에 투입됐거나 사복을 입고 정보 수집 활동을 했던 '편의공작대' 출신 계엄군의 참배는 과거 여러 번 있었어도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위관급 계엄군이 공개적으로 참배한 것은 고씨가 처음입니다.
고씨는 44년 전 자신의 지휘를 받아 시민들에게 무자비한 진압 작전을 행했던 지역대원 100여 명의 만행을 참배하는 내내 떠올리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대학생 주도로 폭동이 일어났으니 이 사태를 진압하라"는 상부 명령을 의심하지 않고 곧이곧대로 믿었고, 도심을 오가는 시민군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는 사실을 44년 만에 참회했습니다.
시종일관 굳게 다물었던 고씨는 계엄군의 폭행으로 숨진 5·18 최초 사망자 고(故) 김경철 열사 묘역에 도착하자 "천 번이고 만 번이고 죄송합니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비상계엄령이 전국으로 선포된 1980년 5월 17일 광주에 가장 먼저 투입됐던 고씨는 시위 진압을 위해 전남대학교로 투입됐습니다.
'폭동 사태'라는 상부의 말과는 다르게 투입 첫날 이렇다 할 대치는 없었고, 본격적인 시위 진압 작전은 18일 오전 10시 동구 금남로 일대에서 이뤄졌습니다.
조선대학교로 주둔지를 옮겨 도심을 오가는 시민들의 머리를 진압봉으로 여러 차례 때렸고, 눈에 보이는 족족 무차별적으로 폭행했다고 합니다.
계엄군의 만행에 맞선 시민들 역시 과격한 시위를 벌였는데, 이 시위에 못 이긴 고씨의 지역대는 5월 20일 전남 화순 등지로 철수하면서 시민들을 향해 총을 쐈습니다.
고씨는 "'부사관 1명이 시민군의 총알에 맞았다'는 무전병의 보고를 받았다"며 "'어디서 쐈는지 모르니 옥상 방향으로 총을 쏘라'고 최초 발포 명령을 내가 내렸다"고 고백했습니다.
갈수록 악화하는 대치 상황에서 다쳐가는 부하를 지키기 위한 자위권 목적의 명령이었다면서도 신군부 핵심 세력 등의 상부 지휘·지시는 없었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서로를 향해 총을 쏘며 생사가 오가는 진압 작전에 투입된 데다가 40여 년이 흐른 탓에 헬기 사격 여부 등 구체적인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고씨는 "지역대장·참모들과 이야기를 나눴지만, 헬기 기총 사격을 봤다는 사람은 없었다"며 "다만 당시 우리가 계엄군이었으니 계엄군의 작전·지시에 대한 책임은 이희성 계엄사령관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전했습니다.
이어 "나 같은 계엄군들이 사과해서 피해를 본 광주 시민의 노여움이 풀릴 수만 있다면 언제든지 사과하겠다"며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었던 5·18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계엄군들이 스스로 뉘우쳐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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