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가짜뉴스 바로잡기!
폭동인가? 신군부의 사전기획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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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두환, 정호용, 장세동 등 신군부 핵심 인물들의
5·18 개입 정황들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80년 5월 20일과 21일 광주역과 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가 있었지만, 3공수여단장과 11공수여단장은 상급자인 31사단장과 전교사령관에게 보고하지 않은 걸로 밝혀졌고요
- 2007 국방부 5·18 진상규명조사 보고서 중 -
미국 기밀 문서에는 “신군부가 한국 정부의 정당성을 무시하고 학생은 물론 거의 모든 정치 세력들에 대한 강경 진압을 일삼고 있는데 이미 신군부로 권력 이양이 진행 중이다, 대통령과 정부도 군의 결정을 신성시한다”라는 증언이 나와 있습니다.
“The Korean military leadership has ignored legitimate authority in ROKG to institute a tough crackdown on student and probably the entire political spectrum. An all but al military takeover may be in process. President and cabinet have sanctified the decision”
- 80년 5월 17일 한국 시간 오후 4시 반,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가 미국 국무부 보낸 비밀 전문 -
또 김충립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은 3월 25일 MBC와의 인터뷰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최측근, 장세동 특전사 작전참모가 광주에 급파됐다고 밝혔는데요.
(인터뷰) 김충립 / 5·18 당시 특전사 보안반장
"5월 17일 일주일 전쯤에 10일 쯤에 장세동 씨가 제 방에 배낭을 메고 와서 '여보, 나 광주로 출장간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예요."
- 3월 25일 MBC 인터뷰 중 -
장세동 씨 본인도 마지막 도청 진압작전 때까지
광주에 머물렀던 사실을 털어놨습니다.
(인터뷰) 장세동 / 5·18 당시 특전사 작전참모
"당일치기로 갔다가 하루 저녁 자고 오는 경우도 있고 그렇게 해서 마지막 작전은 본 다음 올라왔지."
- 3월 25일 MBC 인터뷰 중 -
또 다른 측근인 보안사 인사처장 허삼수 대령이 정호용 특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진압작전에 헬기를 투입하자고 제안했다는 증언도 나왔는데요.
전 씨는 그동안 5·18 진압에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주장해왔지만 수족과도 같던 최측근 인사들의 5·18 개입 정황이 드러난 겁니다.
이 뿐만 아니라, 3공수여단 11대대 소속 지역대장으로 광주에 왔던
신순용 전 소령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공수부대만쓰던 무전기와 31사단 등 일반 계엄군들과 함께 쓰는 무전기 등 2가지가 있었다”고 증언했습니다.
(인터뷰) 신순용 / 5·18 당시 3공수여단 11여대 소속 지역대장
“주파수가 31사단하고 긴급 통화하고 협조할 일 있으면 그 주파수로 통화도 다 되고 특전사령부랑 육군본부도 별도로 무전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
공수부대는 일반 계엄군과 공유하지 않은 정보 보고와 지시가 있었다는 건데요.
상명하복이 생명인 군대에서 지휘체계 이원화라니요?
특히 계엄 상황에서의 지휘체계 이원화는 쿠데타와 다름없습니다.
이 때문에 5·18 민주화운동을 신군부가 권력찬탈을 노리고 꾸민 다단계 쿠데타로 주장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79년 10.26 이후부터 12. 12까지를 군 장악 모의 준비 단계로,
12.12부터 80년 4월 14일까지를 군 장악 뒤 권력구조 재편 과정으로,
5월 17일까지는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서리 겸임을 기점으로 행정부 전반을 장악한 다음,
5·18을 거치며 무력으로 민중세력을 항복시키고, 그 기세를 몰아 실권을 장악한 뒤 8월 27일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으로 추대됐다는 겁니다.
특히 5.17 비상계엄확대조치에서 김영삼을 빼고 김대중만 구속시킨 점,
서울과 광주에서 일어난 산발적인 학생들의 저항 가운데 광주에만 공수특전단을 투입해 강경 진압한 것은 신군부의 전략적 선택 속에서 파악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인터뷰) 이재의 / ‘죽음을 너머 시대의 어둠을 너머’ 저자
“광주에서 김대중 씨 그런 식으로 갑자기 붙잡아 넣으면 당연히 광주 사람들이 반발할 것이란 것은 누구나 다 예상할 수 있는 일이고, 그렇기 때문에 이 광주 지역에다가 7공수부대를 투입을 했던 것이죠. (부마항쟁 때는) 부산쪽에는 공수부대 투입을 안했지 않습니까 뭔가 처음부터 의도를 가지고 들어가자마자 수색을 해서 학생들을 무조건 연행을 해라, 라는 오더를 받고 들어왔던 것이죠”
실제로, 당시 충정작전 훈련 문서에는 “초기부터 잔혹하게 진압하면 상황이 끝날 것,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지 상실하게 만들 것”이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계엄군, 부마사태를 교훈삼아 초기부터 무자비한 타격을 퍼부었다
군대만 보면 겁이 나서 데모의지 상실하게 만들려는 의도”
- 2007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자료 p.64 -
이처럼 광주를 희생양 삼아 정국을 제압하려 했던 신군부의 기획은 시민들의 집단 항쟁으로 어긋나게 됩니다.
시위 군중은 시간이 갈수록 증가해 21일에는 20만 명까지 늘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지역적 특수성을 간과한 강경진압이 화를 키웠다고 말합니다.
(인터뷰) 윤재걸 / ‘작전명령 화려한 휴가’ 저자
“농촌 배후 도시, 농촌 배후 도시는 전부 다 인간관계가 연결돼있어. 농촌 배후 사회로서 연대 관계가 있는 거야, 그러니까 광주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던 거지”
(인터뷰) 염행조 / 前 나주서 보안과 소속·집회 당시 전남도청 주변 경비
"경찰관 중에는 데모하는 학생들이나 일반 시민들 중에 아들도 있을 것이고 친인척도 있을 것이고 그렇단 말이에요 나뿐만 아니고 다 괴로워했었지. 방법이 서툴렀다고 우리들끼리는 그때 당시에 그랬었지"
이는 당시 광주 치안을 맡고 있던 안병하 국장의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안 국장은 자신의 비망록과 88년 한겨레와의 생전 마지막 인터뷰 등에서
5·18 민중항쟁의 책임을 신군부의 과잉진압으로 지목했습니다.
(인터뷰) 윤재걸 / 88년 당시 한겨레 신문 기자
“지금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군부가 있을 수 없는 공수부대를 투입함으로써 광주시민들에게 분노를 안겨주고 광주 시민들의 분위기를 깨서 이런 사태가 발생했다고 확신을 갖고 말을 하시더라고”
실제로, 공수부대가 투입되기 전인 5월 17일 이전까지 광주는 비교적 평온했습니다.
5월 14일부터 5월 16일까지 열린 민족민주화성회는 경찰의 협조 하에 열렸고요, 5월 17일에는 오랜만의 휴일을 맞아 외출, 외박을 나온 전경들도 있었습니다.
(인터뷰) 이상규 / 5·18 당시 전남도경 기동대 3중대장
“안병하 국장님이 하시는 말씀이 전국적으로 계엄도 확대되고 했으니까 요즘 조용하고 애들 많이 고생했으니까 빵 좀 먹이고 애들 잘 좀 하라. 그 말씀을 막 하는데 전남대학에서 정문에서 시위한다고 무전이 딱 나오더라고요”
요약하자면, 신군부가 권력 찬탈을 위해 광주를 희생양 삼아 강경 진압을 지시했지만, 예상치 못한 집단 항쟁에 부닥치자 집단 발포로 학살한 게 5·18 민중항쟁의 주요 과정인 것입니다.
이처럼 신군부의 다단계 쿠데타라는 역사적 맥락을 배제한 채 단편적 사실들에 매몰돼 시민들이 왜 총을 들었나? 왜 장갑차 공장을 기습했나?
왜 무기고를 털었나? 왜 도청을 장악했나? 라고 따지는 것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저항권마저 인정하지 않는 잔인한 질문입니다.
광주 시민들은 계엄군이 물러선 치안 공백기 동안 주먹밥을 나눠먹고 헌혈로 생명을 살리며 공공질서를 지킴으로써 ”우리가 항쟁에 나선 건 무고한 희생을 차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도, 5.18 민중항쟁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북한군 소행으로 의심하면서, 전두환 일당을 두둔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웃의 아픔에 공감해본 적이 없거나 공권력이 진짜 해야할 일을 잘 알지 못하는 자들인데요.
여러분께 다시 묻겠습니다.
권력 찬탈을 위해 시민들을 학살한 전두환 신군부와 이웃들의 아픔을 나눈 광주 시민들 가운데 여러분은 어느 편에 공감하시나요?
단언컨대, 전두환은 파렴치한 거짓말쟁이이자, 학살자입니다.
물론 문학적 표현입니다.
기획·구성 김태관 / 출연 정의진 / 편집 전준상 / 그래픽 김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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