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 16일.
진도 앞바다에 세월호가 가라 앉았습니다.
긴박했던 구조의 순간과 안타까웠던 가족들의 기다림.
8년 전 그 곳에서 그들과 함께했던 이들은 여전히 그 날을 잊지 못합니다.
△조양복(구조 어선 선장)
해경의 구조 요청을 받고 갔던 '뉴진도'호의 선장 조양복입니다. 사람이 제일 힘든 게 그것 같아요. 지금도 그런 게 막상 현장에 갔지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거. 배(세월호)가 크다 보니까, 이미 절반 이상이 전복된 상태에서 도착했다 보니까 멀리서 볼 때는 해경 헬기들이 막 구조하고 그것까지는 봤어요. 가까이 와보니까 더 이상 또. 해경처럼 근접 거리에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고 잔해물이나 쓰레기 정도 수거하는 정도밖에 할 수 없었죠.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부분은 마지막 전복할 때 봤던 안에 있던 애들이 얼굴 내밀고 (창문에) 부딪치고 있던 장면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고 유가족들 보면, 오열하고 계신 거 보면 그 근처를 못 있겠어요 그냥. 팽목항에 못 가고 이쪽에서 있었는데 또 이쪽에서 낚싯배가 수색에 협조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기까지 오셔서 뭐 찾아달라 이런 말할 때는 안타깝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당시는 해경이 선내 수색하고 그럴 때니까. 부모 입장이 아니고 그냥 일반 국민의 한 사람이잖아요. 내 자식같은 사람이 오는데 그걸 어떻게 정상적으로 보지를 못하겠어요. 그냥 안타까우니까 일부러 고개를 돌리고 자기 아들, 딸 찾으러 오는 부모들은 수십 분씩, 수백 명 몰려오는데 그 상황에서 같이 못 있죠.
△장길환(자원봉사자)
저는 진도군민 장길환입니다. 세월호 사고로 인해서 첫날부터 우리 범대본 철수하는 그날까지 우리 가족들하고 같이 함께 동고동락을 하면서 봉사를 했습니다. 기억하기가 싫습니다. 사실은 너무 아픔이었고, 그 당시에 봉사를 할 때 우리 가족들 그 마음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한 부분이라도 우리 가족들 위안이 돼야 되겠다는 생각을 해서 봉사를 했습니다.
한 새벽 1시나 1시 반 정도에 해경이 저한테 연락이 옵니다. "머리는 길고 체격은 얼마다, 옷은 뭐 아디다스 상하의 위아래를 입었다"고 연락이 오면 학부모들한테 "학생이 이러이러한데 (본인)자식 같으면 한 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몇 분이 이렇게 나오십니다. 엠뷸런스를 타고 팽목항까지 갑니다, 체육관에서. 그래서 그 학생을 수습하고 학부모하고 또 "우리 딸 맞나 확인 좀 해줘" 하면 제가 가서 "모습이 딸인 것 같네. 음.. 너무 아파하지 말게. 이렇게 수습해서 다행이네. 위안으로 삼세"
우리 가족들은 더 바라지도 않을 겁니다. 왜 사고를 냈으며 책임자는 엄연한 처벌을 받아야 될 것이고 진상 규명을 해야 된다는 생각을 갖고 계시는 우리 가족들이 전부 다 일심동체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현 정부에서도 지금 진상규명을 못 하는 그게 너무 아픔이다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덧 8년.
흐르는 세월에 순간은 흐릿해져 가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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