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장소는 우수영 앞바다"...임원빈 순천향대 연구소장
"기존 진도대교 밑 물목은 거센 물살로 대규모 해전 불가능"
충무공 이순신의 명량해전 장소가 진도대교 부근 '명량 물목'으로 알려졌으나 난중일기를 토대로 추정하면 양도(羊島)와 해남군 문내면 학동리 사이 좁은 해협일 가능성이 있다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임원빈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장은 "그동안 진도대교가 놓여 있는 좁은 물목을 명량대첩 해전 장소로 추정해 왔지만 최근 연구자들은 명량의 빠른 조류 때문에 대규모 해전을 치를 수 있는 장소가 아니라는 데 대부분 동의한다"며 이같이 밝혔습니다.
임 소장은 이런 내용을 담은 논문 '명량대첩과 이순신의 리더십-난중일기를 중심으로'를
내일(3일) 전남 해남 우수영유스호스텔에서 열릴 학술심포지엄에서 발표합니다.
그는 "장소 추정에 가장 중요한 자료는 난중일기"라며 "정유년 9월 16일자 기록에 보면 해전 장소를 추정할 수 있는 여러 정황이 꽤 자세히 묘사돼 있습니다.
이순신이 친히 기록한 일기를 토대로 살펴져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명량해전 해전은 양도-문내면 학동리 해협"
임 소장은 이순신이 해전 하루 전 휘하 장수들을 모아 놓고'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며 외나무다리와 비슷한 좁은 해협을 차단해 배 13척대 133척의 절대 열세를 뒤집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전법을 구사할 전장으로는 명량 물목, 양도(羊島)와 학동리 사이의 좁은 해협 두 곳이 있는데 진도대교 밑 물목은 빠른 조류 때문에 대규모 해전이 불가능해 양도와 학동리 사이의 좁은 해협, 즉 우수영 앞바다일 가능성이 크다고 임 소장은 주장했다.
그는 또 다른 중요한 증거로, 일기에 해전 당일 이른 아침 (왜함대가)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을 치고 있는 곳으로 향했고, 전투 초기에 통제사 이순신이 강력히 저항하자 (적) 함대가 전진하지 못하고 '나왔다 물러났다(乍近乍退)'할 정도로 유속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점, 해전이 끝나고 그 자리에 머무르려고 하였으나 "물이 빠져 배를 정박하기 어려워 진을 건너편 포구로 옮긴(水退不合泊船, 移陣于越邊浦) 점' 등이 이를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
임 소장은 또 영화 '명량'처럼 통제사 배 위에서 백병전은 없었다며 "해전이 끝난 이틀 뒤인 9월 18일 일기에 통제사 배에서 전사자 2명, 부상자 3명이 발생했는데 모두 조총 탄환에 맞은 것으로 기록돼 있다"고 밝혔다.
kbc 광주방송 김효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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