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년 LA올림픽 양궁 금메달..대한민국 첫 올림픽 여성 금메달리스트
만 17살 첫 출전 국제대회서 덜컥 금메달..아무 것도 모르고 '큰일 내'
2분 30초에 3발인데 1분 30초 땅만 보다 남은 1분에 3발 몰아서 쏴
'동메달' 김진호 “향순아, 금메달 따줘서 고맙다 고맙다”며 눈물 펑펑
조기 은퇴, 햄버거 가게 하다 2004년 도미..LA 인근서 양궁 아카데미
'양궁인'으로 살 수 있어서 행복..향수병, 한국 그리운 건 어쩔 수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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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재광 앵커: 서울광역방송센터입니다. '여의도초대석' 오늘은 오랜만에 반가운 얼굴 만나 이런저런 사는 얘기 해보겠습니다. MZ세대 시청자들은 이름을 들어도 누군지 잘 모를 수도 있는데. 우리나라 스포츠 역사상 올림픽 첫 여성 금메달리스트이자 첫 양궁 금메달 리스트. 지금은 미국에서 스포츠센터를 운영하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서향순 전 양궁 국가대표 화상으로 연결돼 있습니다. 대표님 안녕하세요.
▲서향순 LA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HSS 스포츠 아카데미 대표: 네 안녕하세요.
△유재광 앵커: 지금 미국에 거주하고 계시죠. (네.) 한국 TV와 인터뷰는 오랜만일 것 같은데 고향이 광주시잖아요. 고향 시청자들께 먼저 인사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서향순 대표: 네 안녕하세요. 고향이 광주, 광주여고를 졸업하고 지금도 항상 '광주의 딸'로 영광스럽게 잘 살고 있습니다. 저는 84년도 LA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 서향순입니다.
△유재광 앵커: '광주의 딸'이라는 말이 귀에 팍 와서 꽂힙니다. 대표님 지금 미국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어바인에서 서향순 본인의 이름을 따서 HSS 스포츠 아카데미 운영하고 계시다고 들었는데 미국은 언제 가신 건가요.
▲서향순 대표: 제가 2004년 1월달에 왔어요.
△유재광 앵커: 2004년 1월이면 거의 그러면 20년 가까이 되는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라고 하면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는 더 뭐랄까요. 나름 사람들이 알아주고 어떻게 보면 보장되고 안정된 삶을 여기서 사실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이민을 결심하시게 된 계기, 이유 이런 게 좀 궁금한데요.
▲서향순 대표: 처음에는 정말로 미국에서 완전히 살려고 생각을 하고 오지는 않았고요. 그때는 이제 제가 이제 비즈니스를 하면서 너무 지쳐 있는 상태여서 좀 쉬고 싶어서 영어 공부 좀 할 겸 해서 이제 아이들을 보고 왔었죠. (그렇게 갔다가 그럼.) 지금까지 이렇게 살고 있어요.
△유재광 앵커: 미국 얘기는 조금 뒤에 하고 LA올림픽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이게 1984년인데 지금은 우리 양궁 특히 여자 양궁이 워낙 세계 최강이어서 올림픽에서 금메달 따도 '땄나 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 여기기도 하는데. 대표님이 양궁 여자 개인전 금메달을 딴 84년 LA올림픽이 양궁은 물론 올림픽 첫 여성 금메달 리스트잖아요. 그때가 몇 살이셨나요.
▲서향순 대표: 제가 만으로 17살 때였어요.
△유재광 앵커: 만 열일곱이요.
▲서향순 대표: 네, 열일곱이었습니다.
△유재광 앵커: 이게 당시 기록을 좀 찾아보니까 30m 50m 60m 70m 해서 두 번씩 총 288발을 쏘게 돼 있었다고 하던데. 처음에부터 1등으로 출발하신 게 아니고 한 발 한 발 10점에 맞고 1등 하던 중국 선수 역전하고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따신 거죠. (네 맞아요.) 그때 뭐 어떤 마음이셨나요. 막 떨리기도 하고 뭐 그랬을 것 같은데 한 발 한 발 쏘실 때.
▲서향순 대표: 어리기도 했었고요. 또 그리고 해외 국제 경험이 그때가 첫 번째였어요. 그렇기때문에 올림픽이 얼마나 큰 시합이었다는 게 정말 모르고 간 거예요. 알았으면 제가 그렇게 잘 쏠 수 있었을까 라고 생각이 드는데. 네, 정말 몰라서 했던 것 같아요.
△유재광 앵커: 지금 말로 하면 '앙팡 테리블' 겁 없는 10대 뭐 이런 거였네요 그러면. (네 맞아요.) 근데 막상 금메달이 딱 확정됐을 때 그때는 기분이 어떠셨나요. 이게 대한민국 스포츠 역사상 첫 올림픽 여성 금메달리스트고 첫 양궁 금메달 리스트가 딱 됐을 때 기분. 그때 어떠셨나요.
▲서향순 대표: 그때는 첫 여성 금메달 이런 거는 전혀 몰랐었고. 그런데 이제 제가 시합이 마지막 끝나기 몇 발 남겨놓은 상태에서 네 제 뒤에 정말 어마어마한 취재진들이 와 있었거든요. 그리고 또 정주영 회장님도 와 계시고 그랬었는데. 네 마지막 발을 쏘고 나서 이제 금메달 확정이 된 순간 화살을 뽑고 오면서부터는 그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사람들한테 막 이렇게 휩싸여서 네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유재광 앵커: 그런데 사실 그때 더 확실한 금메달 기대주는 당시 세계선수권을 휩쓸고 있던 김진호 선수였는데 (네) 김진호 선수가 좀 부담감에 좀 많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0점을 두 번인가 쐈던가 그랬던 것 같은데. (맞아요.) 그러고도 어쨌든 동메달까지는 하셨는데. 시상식에서 김진호 선수가 많이 울었잖아요. 근데 그때 이렇게 진호 언니 이렇게 우는 거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드시던가요.
▲서향순 대표: 정말 너무 미안했죠. 그런데 제가 이제 너무 미안했지만, 제가 금메달이고 언니가 은메달이었으면 정말로 더 미안했을 것 같은데. 아니 그러니까 그냥 금메달을 땄기 때문에 언니가 저한테 그런 말을 하더라고요 '향순아 고맙다. 니가 금메달을 따줘서 언니가 욕을 덜 먹는다' 그때 막 그러셨어요. 그래서 저한테 너무 고맙다고 진호 언니가 우시면서 저한테 그랬어요. '향순아 고맙다 고맙다' 계속 그러셨어요.
△유재광 앵커: 고맙다는 말을 들었을 때 약간 뭉클하기도 하고 찡하기도 하고.
▲서향순 대표: 그럼요. 그러면서 정말 '톱의 자리'에 있을 때의 행동 같은 거 그런 거를 언니가 굉장히 많이 저한테 조언을 많이 해줬어요. 그리고 그러고 나서 이제 한국 왔을 때 이런 행동이나 그것도 '이제 너는 공인이다. 이런 행동 조심해야 되고' 그러면서 그때부터 언니가 굉장히 저를 많이 챙겨줬었고. 지금도 제가 미국에 있으면서 한국 가면 꼭 보고 오는 사람 중에 한 분이 진호 언니예요.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은 항상 통화를 하고 있고요.
△유재광 앵커: 근데 그 당시 양궁 룰이 2분 30초 안에 세 발을 쏴야 됐다고 하는데 그냥 1분 30초 동안 바닥 쳐다보고 있다가 남은 1분에 세 발 이렇게 몰아서 쏘셨다고 하는데. 이게 제가 스포츠 기자를 조금 했는데 이제 스포츠 선수들이 뭐 좀 자기만의 어떤 습관, 징크스 같은 거 피하기 위한 그런 게 있기는 있는데. 대표님은 뭐 그런 거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서향순 대표: 그거는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제가 이제 이게 양봉이 멘탈 스포츠예요. 그러다 보니까 시간에 쫓기면서 제가 이제 약간 정신적으로 그때 많이 힘든 상태에서 저만의 이제 노하우를 찾는 게 그래 시간을 보내고 제가 무슨 잡생각이 없는 타이밍이 남았을 때 그냥 정신없이 세 발 쏘고 나오는 거 그걸 제가 했던 건데. 정말 안 좋은 버릇이었죠. 왜냐하면 못 쏘면 실수를 하면. 근데 다행히도 실수를 한 번도 하지는 않았어요. 다행히.
△유재광 앵커: 이게 결과적으로 금메달을 따서 그렇지 (맞아요.) 만약에 성적이 안 좋고 그랬으면 엄청 그랬을 것 같은데. (안 좋았겠죠.) 좀 전에 당시 정주영 회장께서 경기를 참관하셨다고 하는데 혹시 직접 만나시기도 하셨겠네요.
▲서향순 대표: 네. 경기 끝나고 바로 제가 제일 먼저 인사를 드렸던 분이 회장님이세요. 회장님이 저를 보시면서 '고맙다 그리고 대견하다' 이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유재광 앵커: 근데 그때 금메달 따고 한국의 부모님이랑 한 통화 연결해서 '단팥죽이 먹고 싶어요' 이런 말이 나와서 엄청 화제가 됐었는데. 저 개인적으로는 옛날에 홍수환 선수가 남아공 더반에서 더블유비에이 밴텀급인가요 그때 세계 챔피언 되고 한국에 어머니랑 전화하면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이거랑 86 서울 아시안게임에서 임춘애 선수가 육상 3관왕 되고 '라면 먹고 뛰었어요' 이거랑 '단팥죽 먹고 싶어요' 이게 스포츠 3대 인터뷰인 것 같은데. 그 순간에 단팥죽 얘기는 뭐 어떻게 하다 나온 건가요
▲서향순 대표: 그때 이제 끝나고 국제 화상 연결이 한국에 한국으로 돼 있어 가지고 통화할 때 제가 워낙에 팥 들어가는 걸 좋아해요. 네 팥죽을 굉장히 좋아하고 그러니까 오빠가 이제 그거 먹으러 가자 말씀을 하신 거예요.
△유재광 앵커: 한국 오셔서 가시는 데마다 단팥죽은 원 없이 드셨을 것 같은데요.
▲서향순 대표: 네. 저는 그걸 항상 지금도 너무 좋아하고 항상 먹어도 질리지 않고 그런 음식이에요 지금도.
△유재광 앵커: 그때 금메달 땄을 때 만 17살 여고생이었는데 이제 언론에서 이렇게 약간 볼살이 발그레하니 통통해서 '꽃돼지'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그랬는데 별명 마음에 드셨나요.
▲서향순 대표: 어떻게 또 그래도 그냥 '돼지'라 했으면 안 좋았을 텐데 앞에 '꽃' 자가 붙어서 그나마 괜찮았죠.
△유재광 앵커: 이게 지금 그때 뽀송함은 사라졌는데 어쨌든 지금 제가 보니까는 약간 세월의 연륜, 경륜 뭐 이런 게 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는데. (벌써 오래 지났죠.) 거의 30년 가까이 지났으니까. (40년이 다.) 40년이 지난 거네요. 그러고 보니까 (네 40년이 다가와요) 이게 84년 LA올림픽 양국에서 금메달 따고 그 이듬해 85년 서울 아시아선수권에서 3관왕을 하고.
▲서향순 대표: 아니요. 그때 서울 아시안게임은 아니고요 인도네시아 아시안컵이었어요. (인도네시아 아시안컵이요.) 거기서 3관왕 하면서 또 이제 제가 금메달을 땄죠. 개인전 포함해서.
△유재광 앵커: 아무튼 폭풍처럼 등장해서 2년 사이에 이렇게 메달을 싹쓸이를 하고 그다음에 어떻게 보면 조금 이른 나이다 싶게 홀연히 은퇴를 하셨는데. 무슨 특별한 계기나 이유 같은 게 있었나요 혹시.
▲서향순 대표: 그러니까.. 모르겠어요. 그때 지금 양궁처럼 그러니까 양궁 하면서 회사에 팀이 돼 있는 그런 회사가 지금처럼 돼 있었으면은 아마 양궁을 계속 했었겠죠. 그런데 저 때만 해도 그게 잘 안 돼 있었기 때문에 이대를 가면서 이제 학교 공부하느라고 이제 아무래도 양궁을 못하게 돼서 이제 그만두게 된 거죠.
△유재광 앵커: 이대는 어떤 과로 가신 건가요. (체육학. 체육학과요.) 그런데 졸업 후에 햄버거 가게를 꽤 오래 하셨다고 들었는데. 양궁이랑 아무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햄버거 가게는 어떻게 하시게 된 건가요.
▲서향순 대표: 제가 그러니까 결혼을 하면서 했죠. 결혼을 하면서 이제 비즈니스를 해볼까 하다가 이제 햄버거 가게를 하게 된 거죠.
△유재광 앵커: 결혼, 남편이 서울 86아시안게임 유도 금메달 리스트로 제가 알고 있는데 자녀분이 지금 세 분이신가요. 전부 다 '스포츠 가족'이라고 제가 들었는데 소개 좀 해 주시죠, 가족 소개.
▲서향순 대표: 저희 지금 큰 딸이 이제 골프 프로까지 LPGA까지 갔다가 이제 그만두고 지금은 여기서 총 매니저 하고 있고요. 네 네. 그리고 이제 아들은 지금 현재 SC 해외 스카우터 지금 하고 있고요. 그리고 막내 딸은 지금 현재 골프 선수로 USC 골프 선수로 지금 하고 있죠. 대학 다니면서.
△유재광 앵커: 어떻게 다 이렇게 스포츠 선수로 키워내셨나요.
▲서향순 대표: 글쎄요 제가 남편이랑 저랑 스포츠를 하다 보니까 그냥 저희가 잘 할 수 있는 게 스포츠니까 그래서 이제 그쪽으로 하게 된 거죠.
△유재광 앵커: 앞서 미국 이민 얘기 잠깐 했는데. 양궁을 가르치더라도 한국이 상대적으로 훨씬 더 쉽다, 쉽지는 않겠지만 좀 편하셨을 것 같은데. 이게 물설고 낯선 이역만리 타국에서 양궁 지도자의 길을 가게 된 계기나 이유 뭐 그런 게 있을까요.
▲서향순 대표: 처음에 제가 여기 이제 살면서 이제 신문에 간혹 서향순이 여기 와 살고 있다 라는 게 좀 몇 번 나왔어요. 그러면서 그걸 보고 이제 양궁을 배우고 싶은 사람들이 저한테 연락을 해서 계속 해달라고 그래서 그렇게 스타트가 된 거죠. 그래서 했는데 지금은 너무 잘한 것 같아요.
△유재광 앵커: 이게 우리는 보통 엘리트 체육이라고 그래서 체육을 시키면은 무조건 금메달 따야 되고 1등 해야 되고 이런 게 있는데 미국 같은 경우는 조금 많이 좀 다르잖아요. 걔들은 하는 게 환경도 다르고.
▲서향순 대표: 네 여기는 이제 기본적으로 이제 그냥 엘리트 체육은 아니고 그냥 취미로 하면서. 네 또 여기는 기본적으로 공부가 학습이 첫 번째가 되는 거고 사이드로 어떤 스포츠를 하느냐 이런 거를 좀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교육 자체가 그러다 보니까. 이제 양궁을 많이 하는데 양궁이 이제 집중력에 도움이 되니까 그것 때문에 많이 좋아하세요. 그러면서 아이들이 또 활을 쏘면서 스트레스도 풀고 집중력도 좋아지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여기 미국에서의 이런 교육에 딱 맞는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까 아이들을 가르칠 때 제가 선수를 키우는 게 아니고 아이들한테 정신적인 도움을 주는 거라 그래서 굉장히 보람이, 가르쳐주는 것도 보람이 있고요
△유재광 앵커: 정신적 도움이라는 거는 뭐 어떤 걸까요.
▲서향순 대표: 요즘에 왜 잘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굉장히 정신적으로 힘들어하잖아요 하는데. 이 스포츠 물론 모든 스포츠가 다 똑같지만은 저희 양궁이 약간 멘탈 스포츠예요. 그러다 보니까 멘탈 컨트롤을 하는 거를 여기서 많이 배우더라고요. 그래서 정말로 공부만 하면서는 멘탈에 대한 거를 많이 체험을 많이 못하는데. 스포츠는 순간 슬럼프도, 슬럼프도 있고 그러잖아요. 공부나 일상생활에서 슬럼프에 빠지고 그러면 막 정말로 너무너무 아이도, 엄마 아빠도 힘들어 하시는데 그것을 극복하고 딱 올라갔을 때에. 아이들이 이제 대학교 갔을 때 멘탈 슬럼프를 극복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대학 생활에 도움이 많이 된다 라는 말들을 많이 하세요 부모님들이. 그러다 보니까 그런 정신적인 이제 컨트롤을 양궁을 통해서 많이 배우는 게 보면서 그게 되게 제가 좋은 것 같아요. 가르치는 게.
△유재광 앵커: 양궁 특기생 그런 것도 있나요 그런데.
▲서향순 대표: 여기 물론 있어요. 양궁 특기자가 있는데. 근데 이제 양궁 특기생으로 대학교를 가게 되면은 양궁을 하면서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드니까 대부분 다 그걸 원하지는 않아요. 여기 애들은 공부를 하는 아이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특기생이 아니라 일반으로 대학 가서 학교 클럽으로 해서 취미 활동으로만 하죠.
△유재광 앵커: 부모가 돼봐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된다는 말도 있는데,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도 분명히 있을 것 같은데. 아이들을 가르치는 원칙, 철학 이런 게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서향순 대표: 저는 이제 저희가 애들이 한국 애가 절반 좀 안 되고 이제 더 많은 아이들이 타인종 아이들인데 그런데 이제 물론 제가 영어를 잘하지는 못하는데도 잘 안 되는 영어로도 서로 커넥트, 커넥션이 되는 거 보면은 되게 애들이 그러니까 저는 이제 너무 개인적인 이기주의적인 성격 자체는 제가 많이 컨트롤을 하려고 해요. 애들한테 서로 배려하고. 그리고 아이들의 이제 좀 자존감도 자꾸 올려주려고 제가 하다 보니까 아이들이 굉장히 여기 저희 아카데미에 와서 있는 것 자체를 굉장히 좋아하고. 또 한 아이가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코로나 때 제가 양궁이 없었으면 저는 아마 우울증 걸렸을 거예요 이런 말을 해요. 네 그래서 양궁이 저를 도와줬어요. 이런 말을 굉장히 많이 해요. 다른 아이들도 그런 말을 많이 하는 글 들으면서 내가 지금 큰 일을 하고 있구나. 그러니까 그냥 이게 '어바인'의 안방 이렇게. 애들이 그냥 이렇게 언제든지 와서 쉴 수 있는 그런 이렇게 안방처럼 와서 쉬면 되는 여기가 그런 클럽이 돼 있어 가지고 애들이 많이 안정을 취하러 그냥 쉬려고도 가끔 와요. 아이들이 와서 활을 안 쏴도.
△유재광 앵커: 지금 신 어바인, 오렌지카운티가 LA 바로 밑에 있고. 그러고 보니까 LA올림픽에서 금메달 따고 바로 LA 아랫 동네에서 지금 제2의 인생을 시작하셨고 LA와 참 인연이 깊다는 생각도 드는데. 미국에서 제2의 인생 살아보시니까 어떤가요. 이거는 정말 좋았다거나 보람 있었다거나 그런 거가 뭐가 있을까요.
▲서향순 대표: 제가 물론 여기 와서 지금 한 19년째 살고 있는데 여기에서. 제가 한국에 있을 때는 제 비즈니스를 하느라고 양궁하고 멀어져 있었거든요. 그런데 여기 와서 다시 제가 양궁인으로서 물론 코치지만 같이 양궁인으로서 같이 가고 있다는 게. 어머니가 제가 미국 가서 제일 잘한 게 양궁인으로서 살고 있다는 거라고 하세요. 그리고 그것 때문에 제가 지금 되게 행복하다 라는 걸 느끼고 사는 게 너무 좋다. 행복하다.
△유재광 앵커: 그런데 이렇게 행복감도 느끼시겠지만 이렇게 타국에서 이민 가서 사신 분들 얘기 들어보면 그래도 약간 어쩔 수 없는 향수, 아쉬움, 미련 이런 것들도 있는 것 같은데. 대표님도 뭐 그런 게 있으실까요.
▲서향순 대표: 제가 여기 19년 살면서 제 주변 부모님들이 간혹 가다 옆에서 막 어디 여행 가는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 보면 여행을 정말 많이 다니셨더라고요. 근데 제가 19년을 보니까 제가 19년 미국 살면서 해외여행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거예요. 저는 시간만 나면 한국을 갑니다. 그래서 1년에 한 번씩은 무조건 한국을 가요. 그래서 갔다 와서 '내가 다음에는 다른 데를 가야 되겠다' 해요. 그런데도 와서 두 달 지나면 다시 또 한국에 가고 싶어요. 그게 향수병 문제예요. 그냥 한국이 좋아요. 그냥 한국 가면, 갔다 오면 너무 또 항상 가고 싶어요.
△유재광 앵커: 왜 그렇게 오고 싶으신 건가요 한국이.
▲서향순 대표: 모르겠어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지금도 우리 코치하고 매니저한테 '엄마 11월 한 달은 무조건 한국 간다. 니들이 알아서 해라' 지금부터 막 이렇게 하고 있어요. 왜냐하면 저는 그냥 가고 싶은 데가 오직 한국이에요. 한국만 가고 싶어요. 그런데 여기서 살면서 저처럼 그렇게 하는 사람은 많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그래요.
△유재광 앵커: 아주 들어오실 생각은.
▲서향순 대표: 이제 이렇게 은퇴를 하면 한국 반 미국 반 이렇게 살고 싶은 게 제 꿈이에요.
△유재광 앵커: 이거는 뭐 개인적인 질문인데 한국 양궁, 특히 여자 양궁은 왜 이렇게 잘하게 된 건가요. 양궁 이게 국궁도 아니고 서양 활인데 우리나라 선수들이 왜 이렇게 잘하는 건가요 그런데.
▲서향순 대표: 모르겠어요. 저도 그런 질문을 굉장히 많이 받고 또 한국이 양궁도 잘하고 또 골프 또한 잘하잖아요 한국 여자가. 그게 모르겠어요. 그런 인내력 이런 게 아무래도 강해서 그런가 또 그게 정적인 운동에 이게 도움이 돼서 잘하지 않나라고 생각이 가끔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막 액티브한 스포츠가 아니라 골프나 양궁은 거의 동적인 이잖아요. 그러다 보니까 그게 도움이 돼서 양궁이나 골프가 한국 여자가 잘하나 이런 생각을 가끔 하긴 해요.
△유재광 앵커: 알겠습니다. 조금 말씀을 더 들어보고 싶은데 시간 관계상 마지막 말씀, 앞으로 계획 같은 거 마무리 말씀 듣도록 하겠습니다.
▲서향순 대표: 네네 제가 여기서 양궁을 가르치고 있는데 다음 올림픽이 2028년에 다시 LA에서 하잖아요. 그래서 그때까지 클럽 잘 운영해서 꿈이 있다면 저희 학생 중에 하나가 양궁 대표로 올라 간다거나 이런 게 꿈이죠. 꿈인데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열심히 하겠습니다.
△유재광 앵커: 알겠습니다. 오늘 오랜만에 봬서 반가웠고 좋은 말씀 많이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서향순 대표: 네 감사합니다.
△유재광 앵커: 지금까지 서울광역방송센터에서 LA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 서향순 전 양궁 국가대표와 함께 전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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