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농촌 마을에는 수호신 역할을 하는 선돌(혹은 입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청동기 시대부터 이어져 온 거석문화의 일종으로 마을 입구나 들판에 세워져 마을의 안녕과 무병장수, 복을 비는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본량동 황룡강 강변 들판에 입석(立石)마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본량동 행정복지센터 입구에서 동쪽으로 1.3km 지점 도로변에 입석 마을 이정표가 있습니다.
◇ 주민들 정월 대보름에 제사 지내이곳에서 동남쪽 황룡강 방면으로 1.2km 내려가면 입석(광주광역시 민속자료 제5호)마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입석 마을은 지리적으로 황룡강변에 자리한 탓에 큰물이 지면 수해가 잦아 이를 막고자 일제강점기 마을 주민들이 울력으로 방죽을 쌓기도 했고, 1950년부터 1960년대에도 지게질로 제방을 쌓아 물난리를 막으려 했습니다.
입석은 마을 가운데 자리한 오형렬 씨 댁 마당에 우뚝 서 있습니다.
선돌은 높이 2.3m로, 화강암을 잘라 만들었습니다.
예로부터 주민들이 정월 대보름에 이곳에서 풍요와 다산, 복을 비는 제를 지냈으나 한국전쟁 이후 맥이 끊겼습니다.
◇ 말을 매던 '말똥배미' 지명 남아이후 주인댁에서는 매년 간단한 음식을 차려놓고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입석마을은 조선시대 나주목에서 평동 복룡산을 거쳐 한양으로 가는 길목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고 원촌(院村)이라고도 불렸으며, 말을 매던 '말똥배미'라는 지명이 남아 있습니다.
나주목사가 부임해 한양에서 내려오면 고을 아전들이 이곳에 마중 나왔다고 전합니다.
또한 마을 서쪽 진입로 부근에는 하나의 자연석에 두 사람의 공적을 새긴 공덕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 비는 1833년(순조33)에 세운 것으로 앞면 우측에 '목사민후치성 선정불망비(牧使閔候致成善政不忘碑)'가 좌측에는 '목사이후지연 청덕유애비(牧使李候止淵淸德遺愛碑)'가 함께 있습니다.
재임 시절 오직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선정을 베푼 두 나주 목사를 기리기 위해 세웠다고 적혀 있습니다.
나주 목사를 지낸 민치성(閔致成, 1773~1853)은 조선 철종대의 문신으로, 본관은 여흥이고 자는 만여(晩汝), 1820년부터 1822년까지 2년간 나주 목사로 재임하였습니다.
정조 임금의 조카사위이며 1853년(철종4) 나이 81세가 되어 예조판서를 제수받았습니다.
1830년에 나주 목사로 부임한 이지연(李止淵,1777~1841)은 본관은 전주이며 자는 경진(景進), 세종대왕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 이여(李璵)의 후손이며 우의정을 지냈습니다.
민목사불망비 부근에 옛 주막이 있었으나, 1960년대 제방을 쌓으면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 한 때 강의 범람 등으로 폐촌되기도입석마을은 한때 40여 호가 넘는 큰 마을을 일구기도 했습니다. 2017년 도로건설 과정에서 마을 입구 등 농경지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서 청동기시대 입석과 인근에서 확인된 삼국시대 초기 주거지 등을 통해 선대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마을이 이어지다가 어느 시기 강의 범람 등으로 폐촌되었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마을이 다시 형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한편, 본량동 행정복지센터 주무관으로 근무했던 나종복 씨는 "이 마을 출신 인물로는 오두원 전 해군 중령, 오광교 순천대학교 교수(전기공학 박사), 오남교 회계사, 오윤숙 광산구청 과장 등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댓글
(0) 로그아웃